밤이 깊어지고 맥주 두 캔에 취기가 오르니, 문득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아버지의 성격과 외모를 쏙 빼닮았다고 말하시곤 했다. 술을 즐기셨던 아버지처럼,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취하는 걸 보니 나도 어느덧 그분처럼 나이가 들었나 보다. 어린 시절, 반주 삼아 소주 한 잔, 간식처럼 맥주 한 잔을 하시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진로 소주병처럼 차갑고 무뚝뚝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
어릴 적 시장에서 손을 놓쳐 길을 잃었을 때, 곁에 없는 아버지의 빈자리에 울며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한참 뒤 붉어진 얼굴로 돌아와 "그러게,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다녔어야지" 하고 무심한 한마디를 하셨다. 이제는 나도 인생이라는 시장에서 길을 잃어도 울지 않고 묵묵히 내 갈 길을 찾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늘 술잔을 기울여야만 다정해지셨던 아버지. 고혈압으로 허망하게 떠나신 그분의 희미한 모습은 내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건강을 돌볼 겨를 없이 달리던 그 시절, 아버지의 삶이 어떠셨을지 이제야 헤아려 본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 때문일까, 남편감 첫 번째 조건은 술을 전혀 못하는 남자였고 술 못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 후 자연스레 술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맥주 두 캔에 취하니 비로소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술 한 잔이 팍팍한 삶의 짐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마법 같은 순간이라는 것을. 뼛속까지 계획형 인간인 나조차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며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해방감을 느낀다. 이 황홀한 기분을 아버지도 느끼셨을까?
이제야 아버지의 삶이 궁금해진다. 아버지처럼 술을 좋아하고, 눈이 나빠 뿔테안경을 쓰고, 혈압약을 챙겨 먹는 것까지, 나는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 제 걱정 마세요. 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줄 수 있으니. 부디 내 마음속 술친구가 되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어주세요. 한 번도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인 적 없지만, 당신은 제 마음속 영원한 술친구입니다."
이 밤, 내 마음속 강물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따라 잔잔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