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조마조마는 덤
퇴사준비를 시작했다. 끝이 있다는 생각에 참을만해진다. 후임을 뽑지는 않지만 다른 업무를 진행하던 실장님께 인수인계할 문서를 정리해 나갔다. 2월까지 다니기로 했기에, 연말정산 관련 업무와 3월에 있을 법인세 자료 중 최대한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세무사사무소에 연락해서 퇴직금 정산을 요청했다. 정산서를 받아보니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후 급여가 기준이 되어 퇴직금이 아주 적었다. 이게 맞는지 궁금해서 관련 내용을 알아보았다.
원래는 퇴직 전 3개월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산정되는데 육아기 단축시간 근로 중에는 단축기간과 그 기간 임금이 평균임금 산정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전 급여로 퇴직금이 산정된다고 했다. 세무사사무소에 그 내용을 전달하고 일 5시간 일했던 급여 기준으로 산정된 퇴직금정산서를 받았다. 금액은 680만 원대.
급여가 적었던 터라 거의 4년 일한 것 치고는 퇴직금이 크지 않았다. 퇴직금 정산서를 대표님께 보내드리니, 나를 급히 불렀다.
대표님은,
“이 금액이 맞아요? 이거 누가 작성했어요? 내가 생각한 금액보다 너무 많은데…”
라며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냈다.
설마 내가 문서를 조작이라도 해서 퇴직금을 늘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퇴직금 산정 기준이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하기 전 급여로 된 배경을 설명드렸다. 그럼에도 대표님은 내 얘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퇴직금의 많고 적음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라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나빴다. 내가 일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하게 일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퇴직금임에도 대표님은 내가 하면 안 되는 일을 한 듯한 반응이었다.
회사의 상황이 안 좋은 건 이해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동안 회사의 어려움과 불안을 함께 견딘 거 아닌가. 1년도 아닌 4년 가까이 일한 직원을 돈 앞에 이렇게 홀대할 수 있나.
일하기로 한 시간대로 딱 5시간, 3시간만 일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업무 일정을 맞추기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업무에 할애했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고, 육아하면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에 다른 부분들은 넘겼다. 하지만 회계업무를 맡게 됨으로써, 원래 내가 맡은 업무도 하지 못하고 근무시간이 늘어 그 장점이 사라져 버렸다.
대표님은 나에게 갑자기 예전에 일하던 직원 얘기를 했다. 아는 분이었는지 어떤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서 11개월을 일했다. 그런데 1개월만 더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줬는데, 1년 채워서 일을 하더니 퇴직금을 달라고 하더라며 자기는 그 직원을 생각해서 일할 기회를 준 건데 어떻게 퇴직금을 달라고 하냐는 얘기였다. 갑자기 나에게, 나의 퇴직금을 이야기하는 그 자리에서 그 얘기를 왜 할까? 돌려서 말하는 분이기에 추측을 해보자면, 나에게도 '일할 기회를 준 건데 어떻게 퇴직금까지 달라고 해?'를 돌려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표님이 말한 사람과 나의 경우는 다르지 않나?
이야기 말미에 회사 상황이 안 좋으니 퇴직금을 나눠서 주겠다고 했다. 양해를 구하며 그 얘기를 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고 당당하게, 회사 상황이 안 좋으니 나눠서 주겠다고 통보했다. 몇 개월동안 얼마를 주겠다도 얘기하지 않았다. 몇 개월동안 얼마를 줄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퇴사하는 마당에 속에 있는 말 다 해버려? 싶기도 했으나, 아직 받아야 할 것이 있는 마당에 막 나갈 수가 없었다. 끓는 마음을 억누르며 자리로 돌아왔다. 내 마음은 억울함과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예전에 근무하셨던 분들은 퇴직금 관련해서 못 받아서 신고하려는 분도 있었고, 나눠서 받는 분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내 퇴직금을 받을 수는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 후에 자진퇴사이지만, 내 업무가 아닌 업무를 하게 되어 관둔 것이니 실업급여 처리를 해줄 수 있는지 대표님께 여쭤보았다. 맞는 사유가 있으면 해 주겠다고 처음에는 그랬다. 회사에 불이익이 없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유에 대해 알아보니 회사가 멀리 이전을 하거나 발령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했고, 실제로 사무실 이전 계획이 있었기에 대표님께 그 내용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이사를 안 갈 수도 있고 사유는 사실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 실대 로라 함은 다른 업무를 맡게 되어서 관두게 되었다를 말하는 것 같다.
서울과 용인에 사무실이 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회사 사무실을 정리하고 용인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원래 있던 A라는 용인 사무실 말고, 다른 장소에 새로운 사무실 B를 얻기로 했다. 사무실 B 계약서도 회사 단톡방에 공유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6월쯤 이사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무식 때 용인 사무실 A를 가보았는데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서 한번 갈아타고 내려서 광역버스를 타면 편도로 2시간, 왕복 4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출근이겠지만, 긴 이동 시간을 감내하며 회계 업무를 하러 가고 싶지 않았다. 이사를 안 갈 수도 있다는 말은 황당했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지 않았던 건가?
고용센터에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다른 업무를 하게 돼서 자진퇴사 하게 된 경우 실업급여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변은 그 사유로는 받을 수 없다였다. 대표님께 그 내용을 전하고 다시 회사 장거리 이전으로 받을 수 없는지 요청하니, 이제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1~2주 시간이 지났고, 대표님은 아무 얘기 없길래 생각해 보셨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안될 것 같다고 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거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의 뜻은 안된다를 돌려서 이야기한 거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처음부터 안된다고 했으면 일말의 기대도 없고, 실망도 없고, 알아보는데 내 시간과 에너지가 안 써도 됐을 텐데! 나를 농락한 것 같아 그 순간은 표정관리가 안 됐다. 실업급여는 못 받아도 퇴직금은 꼭 받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 사람을 가장 잘 알려면 행동이나 말보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이번 일을 통해 대표님의 민낯을 보았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건 참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