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맞기
퇴직금은 퇴직 후 14일 이내에 지급해야 하고, 기간 내에 지급하지 않으면, 그다음 날부터 지급일까지의 지연 일수에 대해 연 20%의 지연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2022년 4월에 법이 바뀌어 퇴직연금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퇴직금은 개인 계좌로 입금하지 않고 근로자가 지정한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 내용을 대표님이 과연 몰랐을까 싶지만 일체의 언급도 없었다. 대표님께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할까 하다가도 괜히 퇴직금도 못 받을까 염려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조용히 지나가고픈 마음도 있어 얘기하지 못했다.
나보다 2달 먼저 퇴사한 회계 담당직원은 퇴직금을 못 받고 있었다. 대표님이 퇴직금 주는 시기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도 퇴직금을 못 받게 될까 봐 불안했다. 첫 번째 퇴직금을 3월 말에 보낸다고 했는데 들어오지 않아 4월 첫날에 대표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안녕하세요, 대표님.
다름 아니라, 3월 말부터 3-4개월에 나누어 퇴직금을 지급해 주기로 하셨는데 입금이 되지 않아 연락드립니다. 지출 계획이 있어 이번 주까지 지급 요청드립니다. 퇴직금을 나눠서 주시기로 한 상황에서 기한은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네 안녕하세요. 사무실 상황이 여유치 않아 늦어지네요. 다음 주에 일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나)
네 입금 예정일과 금액을 미리 알려주시면 지출 계획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표님)
다음 주까지 계약 건이 있어서 잘 마무리되길 바라고 있고요. 3~4회 정도 나눠서 지급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합니다.
(나)
네 그럼 1차 입금 예정일은 다음 주 금요일로 알고 있겠습니다. 원만하게 잘 마무리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네 감사합니다.
2월에 퇴사하고, 4월에 첫 분할퇴직금을 받았다. 퇴직금이 늦어질 것 같으면 미안한 기색이라도 비쳐야 하는데 전혀 먼저 연락이 없었고, 매번 내가 언제 보내줄 수 있는지 먼저 연락을 해야 받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더럽고 치사했지만, 그래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퇴직금 금액과 날짜를 물어봐도 대표님은 매번 애매하게 얘기했다. 이번 주 중으로, 아니면 다음 주쯤. 그리고 정해진 날짜에 안 들어와서 또 연락하면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챙겼다 하기도 하고, 퇴직금을 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대표님은 계획형이고 일정을 매우 꼼꼼하게 계획하는 스타일인데 퇴직금 주는 날짜만 이렇게 계획하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퇴직금 보내는 날짜를 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먼저 퇴직금을 보내준 적은 없었다. 매달 연락해야 했고 매번 다른 금액으로 4달에 걸쳐 퇴직금을 받았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첫 분할퇴직금을 받은 얼마 뒤, 대표님께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일채움공제에 내가 회사이름으로 제출했던 서류와 회계 담당직원이 제출한 서류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잊고 있던 나의 기억이 1~2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12월에 퇴사한 회계담당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채움공제 해지 신청을 하려는데 회사 미납금이 있어서 신청이 안된다고. 미납금 내달라는 얘기를 대표님께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다. 내일채움공제에 대해 그날 처음 들었고, 대표님께 몇 번의 전달 뒤, 미납금을 전부 납부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직원에게 해지 사유가 적힌 서류를 받았는데 퇴사 사유에 '자진퇴사'가 아닌 '중소기업의 경제적 부담'사유로 되어 있었다. 알아보니 만기가 아니고 자진퇴사면 자기가 넣은 돈만 돌려받는 거고 회사 측 사유여야만 지금까지 함께 적립된 돈을 받을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이렇게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직원이 혜택을 받게 해주고 싶었다. 그 사유도 이해는 되었다. 급여가 나올지 매달 걱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내일채움공제에 연락해서 회사 측 사유가 되면 회사에 불이익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런 건 없다고 했다.
대표님께 최종 보고를 했어야 하지만 자진퇴사인데 회사 측 사유로 되어있으면 대표님이 승인을 안 할 것 같았고, 내가 임의로 회사 도장을 찍어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 직원에게 줄 의지가 없었으면 대표님이 미납금을 전부 넣었겠어?'
부가세 신고를 하면서 대표님 용인 하에 없는 서류들을 만들어 회사 도장을 찍다 보니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그 일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며 처리했다.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원치 않는 업무가 너무 버겁고, 퇴직금과 실업급여 문제로 대표님에 대한 안 좋은 감정들이 있던 때라 같은 직원의 입장에서 그 직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업무를 감정적으로 처리한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첫 분할퇴직금을 받았을 때도 그 직원은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퇴직금을 줄 듯하며 계속 미루던 대표님은 내일채움공제를 받았으니 퇴직금은 받은 걸로 하자는 얘기를 했고, 그 직원은 그 얘기를 듣고는 고용노동부에 퇴직금 미지급으로 신고했다. 그 과정에서 대표님은 내가 내일채움공제에 보낸 서류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그 직원이 자발적 퇴사이지만, 회사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사유가 납득이 됐었고, 미납금을 납부하셨을 때 줄 의향이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유여도 회사에 불이익이 없다고 확인도 했었고요. 그렇지만 대표님 승인을 받고 도장을 찍은 건 아니어서 절차상 문제가 있다면 제 실수가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두렵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대표님은 나에게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 직원에게 퇴직금 미지급 신고 취하해 달라고 하면서 대면조사에서 그 직원이 임의로 서류를 작성하고 팩스로 보내서 처리한 내용이라고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그 직원을 압박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 상황을 신뢰하는 언니에게 연락해서 조언을 듣기로 했다. 그 직원은 자진퇴사가 맞으니 내일채움공제는 안 받는 게 맞는 거다라는 뼈 때리는 말을 들었는데 감정에 젖어 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아무리 도와주고 싶은 일이라도, 과정이 적법하지 않다면 그 일은 하지 않겠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