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맞지 않는 옷

by 히힛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표님과 마주 앉았다.

“회계업무를 진행해 보니 저에게 이 업무가 맞지 않고 힘든 걸 넘어서서 괴롭습니다. 3시간 안에 할 수 있는 분량도 아니고요. 회계업무는 못하겠습니다. “

그러자 대표님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다. 할 수 있다. 그럼 이 일을 누가 하냐.”

그 일을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가? 다른 직원들은 하면 안 되는 일인가. 대표님 대답에 마음이 삐딱해졌다.


대표님은, 대표로서 본인의 책임이니 회계업무에 대해 모르는 거나 헷갈리는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다. 인수인계는 받았지만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대표님께 연락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일정을 잘 짜야한다는 얘기부터 결론 나지 않는 이야기들만 오갔다.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1월까지 해보고 업무 진행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고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대화 중 대표님은 급여적인 부분을 올려줄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 부분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말로는 누가 못할까. 원래 나의 업무에 더해 다른 업무까지 하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회사의 상황이 안 좋기에 올려준다고 해도 아주 소액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럼 이 일은 누가 하냐.’의 여파일까.

대표님과의 대화는 회사라는 기계에 맞춰 돌아가던 나라는 부품이, 갑자기 빠진 부품의 자리까지 맞추기 위해 제 모습을 잃고 뒤틀려가는 부품이 된 것 같았다.


상생(相生)의 사전적 의미는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감.’이다. 영어로는 win-win.

어느 한쪽만 희생하면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기존 업무에 더해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서 나에게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텨야 할 의미를 못 찾았다.


업무시간? 더 늘어났다. 급여? 똑같았다. 커리어? 내 업무분야가 아니고 회계 쪽으로 전향할게 아니므로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스트레스? 전보다 10배 이상 심했다. 숫자가 맞아야 해서 더 예민한 상태로 일하게 된다. 에너지 소모가 훨씬 크다.


직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말투는 친절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은) 구조가 버겁게 느껴졌다. 먹고살기 위해 내가 이런 것까지 감내해야 하나.


경력자를 뽑아야 그 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데 그에 맞는 급여 주기가 힘드니 신입이나 비경력자에게 일을 시키게 되고 그저 얕은 수준에서 해내기에 바쁜 구조가 되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직원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그로 인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가세 신고로 피 말리는 1월을 버텨내면서 든 생각은 퇴사였다. 이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었지만 이러다가 내가 병이 날 것 같았다. 건강해야 일도 할 것 아닌가.

대표님께 업무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적인 해결방법은 없었고, 대표님의 할 수 있다는 말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맞지 않는 업무로 나를 갉아먹도록 놔두는 게 나의 결혼생활과 비슷하다 생각이 들었다. 그 상황을 그저 참는다고 해결되지 않고, 과감히 그 상황을 내려놔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배운 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회사를 위해 내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내가 나의 힘듦을 대변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기로 했다.


1월의 마지막 날에 대표님께 2월까지만 하고 퇴사하겠다고 사내 메신저로 말씀드렸다. 그날은 재택근무 날이었고, 그만두기 1달 전에는 미리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주 출근날, 대표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님은 퇴사의 이유가 회계 업무 때문이냐고 물었고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마음 확실하게 정한 거냐고 물어보시길래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아서 다른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후임을 뽑으면 인수인계하고 나가겠다고 하니 사람을 새로 뽑을 상황이 아니라고 하며 기존에 있던 다른 직원이 홍보 쪽 업무와 세금계산서 발행 업무를, 대표님이 회계업무를 맡겠다고 했다.

처음이라 그렇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했을 거라고 하신다. 다른 직원에게 업무의 짐을 넘기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후임을 뽑지 않기로 한 건 대표님의 결정이었다.

이전 04화누구를 위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