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억의 창고를 열다
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투명한 우산을 쓰고 가고 있었습니다. 아래에는 여인의 머리만 보이고 발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몸통은 머리에 가리워져서 외측만이 불룩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와―아마도 그렇게 느껴졌습니다―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봄이라는 감각이 있는지 시커먼 멋대가리 없는 우산이 아니라 반투명의 우산을 받치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세상에는 봄 냄새가 임박해 있었습니다. 이제 막 목련이 자신의 몸을 화려하게 펼치려고 꿈틀대고 있을 시기였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몸에도 봄의 향기가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그는 빗소리로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후두둑, 혹은 두두둑, 타다닥, 툭툭툭, 탁탁탁…,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다 동원을 했습니다. 그 소리는 이내 온 세상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요란했습니다. 그래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그가 심금을 울리도록 노크를 해도 그 소리가 귀에 가 닿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빗소리의 향연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고 그래도 뭔가 지난 기억을 불러내는 사자처럼 그녀의 우산을 두드려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모든 의식 있는 자에게 그는 이 봄이 오면 후두둑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지난 겨울 닫아놓았던 그 기억의 창고를 열라고 재촉을 합니다. 자연에 있는 사물은 정직하여 그의 요구에 잘 순응하여 자신을 표하지만 인간이란 작자는 워낙 복잡미묘하기에 좀처럼 자신을 들추어 내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빗소리라든가 봄비 자체를 성가셔합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 일념하기에 비가 그들의 속에 들어와서 그들의 밭을 젖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 소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에게 내리고 그 소리에 누구는 실망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불빛에 소리가 번쩍번쩍 빛납니다. 그 빗 속으로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가고 있습니다. 아까 그 여인이 맞습니다. 발을 쭉쭉 벋으며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 위에서 봄의 행진을 위한 소리를 불러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의 고백을 스스로 듣게 하려고 합니다. 그 빗소리에 자신이 눌려 놓았던 그 앙금을 터뜨리며 흐느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먼 기억 속에 돌아앉아서 이제는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그 굳은 시간을 그가 찾아가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내어놓지 않던 자신의 응어리를 그가 다가가 만져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느덧 풀려서 그녀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 사건이 되어버렸고 한 때는 그녀를 온통 미치게 만들었던 그 사건들의 흔적을 가만히 만지작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해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어둠 속에서 목련처럼 피고는 이우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봄비가 부지런히 우산을 따라가면서 후두둑거리는 것은 그것을 알아보라고 재촉하는 것입니다. 봄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이 시공간을 헤매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맙니다. 스스로 이 짓을 왜 매년 하는지도 모르지만 구태어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걸어가는 그에게 우산 아래에 있던 여자가 위로 쳐다보았습니다. 반투명의 비닐 사이로 쳐다보이는 얼굴은 추상화처럼 모든 얼굴이 분해되어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추상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모든 사물이 이제부터 녹아져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은 봄비가 어디로 가서 누구의 집으로 기숙할 것인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