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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Feb 07. 2022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죽음

  헤세의 글을 한참 읽다가 보면 어느덧 숲속에 들어섰고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 같습니다. 계곡의 물소리도 들리지만 결코 웅장하고 험난하지는 않습니다. 여울물 소리가 따라오면서 혼자 걷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라는 수필집에 셋트로 묶여 있어서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고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더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가 좀 더 서정적이라면 이 책에서는 헤세가 좀 더 사유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한참 읽다가 보니 그의 수필집의 목차에 달린 제목을 가지고 ‘이기적 수필 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제목 자체가 주는 서정이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저와 친화력이 있어 보입니다. 


  헤세의 경력을 보면 의외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가문은 외할아버지가 신학자이자 선교사이고 아버지가 목사입니다. 특히 수천 권의 장서를 가진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14살에 신학교 들어가 결국 자퇴를 하고 15살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복한 가정인데도 그는 대학을 나오지도 못합니다. 그 후 서점의 사원, 시계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문학에 입문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가정의 배경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의 종교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할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분명히 헤세가 신학자나 목사가 되기를 바랬다고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문학의 길을 갑니다. 결국 노벨상까지 탔으니 성공은 한 셈입니다만. 


  그의 글을 읽다가 보면 니체처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동의한다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무얼까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성경을 합리로 따지면 결코 성경을 믿을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은 욥기의 욥처럼 모든 것을 항복하고 마지막 카드는 합리성과 병행할 수 없는 믿음뿐입니다. 헤세는 믿음으로 가기보다는 그의 합리성에 백기를 들었던 것일까요.


  책에 나오는 헤세의 사진을 보면 교수나 목사 같이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 같이 보입니다. 그런 그가 자살에 대해 부정적이기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살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을 옮긴 자살을 보면서 그것을 다른 종류의 죽음보다 더 소홀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기 사항으로 되어 있지만 헤세는 인간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결단한다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마찬가지로 헤세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는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위도식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가끔이라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는 생활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새로 깨달은 것을 해석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숙성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꾸만 다시 자연스러운 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 어린이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땅의 벗이요 형제라고 생각하며, 식물과 바위와 구름을 느껴보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가 생각이 나서 메모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도 숙성을 원합니다. 따라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무위하고 권태하며 하는 일 없이 보내고 텅 빈 휴지기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파악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 자기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초자아적인 의미에서 스스로의 생각에 동의하는 데에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가 또다시 매듭을 짓고는 한다. 그런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나면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완결된 미소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목표가 마침내 달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이생의 삶을 다하고 환생하기 위해 실체가 없는 곳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납니다. 어린 시절을 거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갑니다. 청년을 지나면 누구나 독립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직업을 선택합니다. 인간은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거기에 자신의 이상을 갖다붙이고 시간의 강물을 타고 흐르면서 헤세의 말처럼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고 또다시 매듭을 짓’습니다. 목숨이 다하면 각자의 역량대로 깨달음을 얻고 ‘실체가 없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평생이고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이 한계는 인간이 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수필들을 헤세가 몇 살에 썼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이 말을 보고는 저의 나이를 돌아보면서 동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삶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지금의 나는 삶을 사랑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몬타놀랴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고 하니 그가 85세에 사망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에 스위스 골짜기를 찾아들어 갔습니다. 바로 그는 은자였던 것입니다. 저도 그런 은자의 생활을 간혹 바라기는 하지만 그렇게 결단을 내릴 용기는 없는 위인입니다.


책 중간 중간에 헤세의 시가 나옵니다. 헤세는 14살 때 시인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헤세의 시는 요즘은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이미지 중심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읽는 함축적 시작법입니다. 묘하게도 헤세는 1877년 생이고 릴케는 1875년에 태어났습니다. 릴케가 훨씬 빨리 운명했지만 둘 다 비슷한 시대를 살다 갔습니다. 릴케는 그때 벌써 사물시를 씀으로써 이미지 중심으로 전향했습니다. 헤세와 릴케의 시를 비교하면 헤세는 어쩌면 아마추어 같은 느낌도 듭니다.


  책의 제목도 인상적입니다. ‘삶을 견디는 기쁨’, 원제목이 그런 건지 번역자가 의역을 한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여 주차하고 보니 차 뒤바퀴 옆에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풀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풀이 있는 곳은 흙 한 톨 없는 아스팔트였습니다. 연한 초록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 책 제목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삶을 견디는 기쁨’. 그 풀이 그런 기쁨까지 느끼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가 지금 할 일은 오직 삶을 견디는 것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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