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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Feb 03. 2022

『무가(武家)와 천황』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

  친구 병원에 혈압약 타러갔다가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친구는 나를 보면 ‘친일파’ 왔네라고 농당반 진담반으로 말할 정도이니 이런 책을 주면 좋아하리라 생각한 셈입니다. 그러면 그건 내 탓만은 아니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합니다. 아마도 조상 가운데 임진왜란 중에 왜놈 피를 받은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일본이란 나라는 한국 사람에게는 애증이 엇갈리는 존재 같습니다. 일제 치하 36년간의 수모를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기회만 있으면 물어뜯으려고 합니다. 우스갯 소리로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우습게 보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논리를 왜 중국에게는 적용하지 않는지 저로서는 잘은 이해가 안 갑니다. 치욕을 받은 횟수나 강도를 보면 결코 일본에 못지 않은 데도 말입니다. 


  이번 구정에 무주 리조트에 갔다가 구천동 ‘어사길’을 걸었습니다. 입구에 들어가자 화장실을 들렀습니다. 엄동설한에 화장실도 따뜻하고 게다가 세면대에선 따뜻한 물까지 나왔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희 집 화장실보다 시설이 좋았습니다. 저절로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야, 한국 정말 잘 살게 되었네.” 그러면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이런 공중화장실은 ‘푸세식’이었고 난방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산업 역군들은 각 회사마다 일본으로 파견 나가서 열심히 보고 베껴왔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공부했지만 제가 볼 때 한국 산업의 근대화는 일본의 협조가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회의가 듭니다. 일제 치하도 한국민의 자존감에는 치명적이었으나 솔직히 말해서 고종 시대보다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일인당 GDP도 훨씬 능가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데 그놈의 받은 수모가 한쪽 사실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 책을 보면서 평소에 일본에 대해서 가졌던 의문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2차세계대전이 패전으로 끝나면서 왜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는지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자 이씨 조선 왕족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쇼와(昭和) 천황은 바로 일본 패망의 주역입니다. 자신들의 부모형제를 사지에 몰아넣은 주역인데도 다시 천황으로 존속시키는 일이 어떤 면에선 불가사의(不可思議)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은 2차세계대전을 하면서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긴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다가 원자폭탄을 맞아서 민간인 수십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사망자와 연관된 가족 친족까지 따진다면 원자폭탄과 관련된 인구는 수백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알기에는 일본사람들이 ‘반미 데모’를 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의 반미 데모와 비교하면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무가 즉 막부(幕府)와 천황 사이의 정치적 권력 싸움의 이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부 정치는 찾아보니 1192년에서 1868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쇼군의 정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 막부의 실질적 권력자인 쇼군(将軍)이 통치권을 가졌습니다. 1192년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鎌倉)에 최초의 막부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치 권력의 싸움이 있었는데 이른바 ‘고려 무신 정권’이라고 해서 정중부, 최충헌 등에 의해 1170년부터 100년간 지속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주로 전국시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측면을 가지고 살피고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황에 대해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무장이었으나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는 천황의 칙명을 이용하여 어려운 경지를 모면합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주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기습전 때문에 패하고 맙니다. 이로써 도요토미는 무력 재통일 전선에 파탄이 나고 도쿠가와라는 가시를 같이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도요토미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쇼군)이 아니라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관직인 관백(關白)이 됩니다. 말하자만 실권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나 명목상으로는 천황을 내세워 천황의 명령인 것처럼 해서 모든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콤플렉스가 숨어 있었고 따라서 천황의 위광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나가쿠테 전투의 패배였다고 합니다. 도요토미와 천황과의 관계를 언필칭 ‘왕정복고’라고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도요토미가 무력으로 일본을 통일하고 나중에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려고 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도쿠가와라는 적수를 안고 천황을 둘러엎고는 관백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술수로 통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국 사람에게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몰랐던 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도요토미가 조선과의 전쟁 중에 바다 너머 조선으로 오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만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천황을 북경에 두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천황이 그것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반대하여 결국 성사는 되지 못했지만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멸망하는 데 가장 치명적인 전투가 세키가하라 전투였는데 이 전투는 도쿠가와 자신의 힘으로 이긴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도쿠가와 편에 든 열한 개의 다이묘 중에서 아홉 개가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도요토미 계열의 배신의 덕을 입은 도쿠가와가 승리했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칠 형편이 처음에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히데요시는 자기 편에게 패망한 것입니다. 굳이 오늘의 한국을 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정치판은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다 배신자들이 판을 치는 모양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2년 2월에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합니다. 관백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왕정복고를 원리로 하는 지배 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황관은 공가(公家)와 무가(武家)의 본분을 분명히 구분하고, 천황가를 정치로부터 격리시켜 고실(古實)·학문(學問)의 영역에 전념시킨다는 점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황위 계승 결정권도 약 120년만에 무가측으로 되찾아왔습니다. 또한 천황가의 전쟁 개입에도 종지부를 찍게 합니다.


  종교적 권위에 대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히데요시는 유신(唯神)을 주창하였고 사후에는 유일신도(唯一神道)에 의해 신으로 모셔졌습니다. 반면에 도요토미 이에야스는 ‘습합’(習合/종교 따위에서 서로 다른 교리를 절충함)을 중시했습니다.

  번역하신 이근우 교수의 후기에 의하면 천황이 세속적인 정치 권력으로서는 몰락하였지만 주술적인 제사 왕권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가는 불교와 지방 신사(神社)는 장악했지만 22사로 대표되는 조정 측에 속하는 신사의 기도권은 천황이 가졌습니다. 무가 권력이 천황의 종교적 권위를 휘어잡기 위해 사후에 신격화하려고 히데요시는 팔번보살(八幡菩薩)이 되려고 했고 이에야스는 도쇼다이곤겐(東宮大權現)이 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미즈노오(後水尾天皇, 1596~1680) 천황의 ‘급작스러운 양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종의 도쿠가와 막부와 천황가의 ’밀당‘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미즈노오 천황은 재위 중에 몇 번이나 양위를 자청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막부는 당황하여 수습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퇴위를 인정하면 되는데 필사적으로 만류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몇 가지 듭니다. 막부가 천황의 퇴위를 압박했다고 일반에게 받아들여질까 우려했고, 막부는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도 곤란하지만 천황이라는 권위가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무가의 수장을 정이대장군으로 지명하는 명목상의 상위자가 필요불가결했던 것입니다. 


  고미즈노오 천황은 일곱 살 소녀인 오키코에 대하여 내친왕(內親王) 임명을 강행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는 나중에 알고 화를 내지만 우여곡절 끝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호소카와 산사이는 천황이 퇴위한 이유를 열거하였습니다. 첫째, 공가의 관위 수여나 승진에 관하여 막부의 관리, 규제가 엄격하여 천황의 재량권을 행사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둘쩨 궁궐에 딸려 있는 여러 무가(武家)가 여유 재원을 천황에게 쓰지 못하게 하였다. 셋째, 자의(紫衣) 사건의 충격을 지적하였다. 천황의 명령서가 한 번에 칠팔십 장이나 찢겨 나가 천황으로서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했다. 자의 사건의 처리는 천황가의 중대한 권위 실추를 초래했다. 넷째, ’숨겨져 있는 사정‘으로 드러내놓을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후궁들의 배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배를 눌러 죽이거나 유산을 시켰다. 히데타다의 딸이 천황에게 시집을 가서 그 후손이 대를 잇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고미즈노오 상황이 직접 지은 와카(和歌)를 인용한다. “생각나는 일/쉽게 흐르는 눈물/등지는 세상에/서글퍼지더라도/아쉬울 것 없는 몸을”


  고미즈노오 천황의 일종의 항의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이고 왕정복고를 근간으로 하는 메이지 유신까지는 막부는 천황을 견제하였으며, 천황이라는 존재는 무가 정권의 필요불가결한 보완물이었던 것입니다. 


  에도 시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라고 합니다. 반면에 이조 시대는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한양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때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을 강탈당한 때까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성계가 어쩌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의 이성계는 고려의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 당시도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반목하다가 최영, 정몽주를 제거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꿉니다. 이번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은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였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우리는 사대주의하면 기본적으로 악으로 알았는데 사대주의가 이씨 조선의 기본 이념이었다니…….


  일본의 전국시대와도 비슷한데 한쪽은 비록 허수아비라도 천황을 유지하면서 나라를 통치하였고 다른 한쪽은 왕을 폐위시키고 역성혁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두 나라의 민족의 특성이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언가 제도를 잘 안 바꾸는 것 같습니다. 요코다(橫田) 메구미가 북한에 납북된지 40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 요코다 시게루가 얼마 전에 타계한 뉴스를 NHK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NHK 뉴스를 본지 30년이 넘는데 그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요코다 시게루의 뉴스를 안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일본은 무언가 한 가지를 하면 잘 놓치지를 않는 민족적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냄비처럼 끓었다가는 그 다음에는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우리도 납북 문제가 일본 못지 않게 심각할 것인데 이렇게 끈질기게 뉴스를 한 적이 있나요. 이런 것이 어쩌면 천황제의 존속을 그토록 이어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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