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왜 하느냐 하면 교양을 쌓기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요? “저 분은 교양이 있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의 교양은 인격의 품위를 가리킵니다. 교양은 영어로는 culture(경작)이고 독일어로는 Bildung(형성)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만 교양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작하듯이, 만들 듯이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품위 있는 삶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품위가 어디서 나올까요? 누구나 환경이 좋을 때는 그 인간의 진가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죽음이라든지, 모멸을 받았을 때라든지, 힘든 병에 걸렸을 때라든지, 무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에게서 나오는 행동과 언어로 우리는 한 인간의 품위를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 경지는 극복하고 있지 못합니다. 남에 의해 불리한 상황에 빠질 때라든지, 저를 모욕할 때는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언젠가 어디서 읽은 것이 생각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할 때 존경어를 쓰라고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은 제가 책을 읽은 느낌을 말하는 독후감을 쓰기보다는 헤세는 어떤 방식으로 독서를 했는지 소개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생을 책 속에서 산 그의 삶이 어떤지 살펴보고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봅니다.
헤르만 헤세는 신학자이자 선교사인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 외할아버지는 수천 권의 장서가였으며 인도에서 선교사를 했습니다. 헤세가 작가가 되고 인도의 삶의 태도에 대해 영향을 받고 또 그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하면서 여기서 더 나아가 중국의 책들, 나아가 일본에까지 그의 시야가 넓혀집니다.
학창 시절에 들은 말 중에 삼다(三多)가 있습니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다독, 다작, 다상량(多讀, 多作 多商量)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헤세는 다독 또는 남독에 대해서 부정적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저는 한글을 다시 한문으로 괄호를 치면서 쓸 때마다 짜증이 납니다. 왜 국한문을 혼용하지 못하고 이런 우매한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글만 볼 때와 한문이 같이 있을 때 우리 뇌의 상상력이 달라진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 미친다고 하면 그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문학을 이처럼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고 있음에도, 뮐러 씨나 마이어 씨 할 것 없이 다들 너무 많이 읽는다. 전혀 감동이 없으면서도 다른 일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지나치게 바친다. .. 이는 마치 어떤 미련한 환자가 약국에는 좋은 약이 많다면서 칸칸마다 뒤져 온갖 약물을 돌아가며 다 먹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남독은 결코 문학에 영예가 아닌 부당한 대접이라고 말이다. ..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로지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 한권 한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마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것은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제목이 ‘독서의 기술’이라면 진정한 독자, 올바른 독자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헤세의 말을 들어 봅니다.
「오늘날 읽기는 누구나 다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 하지만 소수만은 철자와 단어의 그 특별한 경이에 여전히 매료당한 채 살아간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독자가 된다. ..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 그렇게 책을 사는 사람, 그 느낌과 정신에 마음이 움직여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무분별하게 이것저것 읽어내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와닿는 책들, 깨달음과 기쁨을 안겨주는 작품을 가려 찬찬히 모을 것이다. .. 몇 권 안 되는 책만 갖추고도 너무나 훌륭한 독자들도 얼마든지 있다. ..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대중적인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넓혀주고 깊게 해주는 책을 찾아서 독서라는 자기만의 길을 가야한다고 헤세는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어서 교양을 넓히려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것이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과 같은 분야일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책 하나를 읽더라도 그것을 깊이 있게 탐색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느냐에 더 비중을 둡니다.
「다만 수준 높은 사상가나 작가의 작품 하나라도 속 깊이 이해한다면 이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의식과 이해를 접하는 하나의 성취이자 행복한 경험이리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택해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타인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그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삶과 맥, 아니 그 총체와 더불어 활발하게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헤세는 ‘훌륭한 세계문고를 갖추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적으로 고전이 된 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유대, 인도, 중국, 그리스의 책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대, 프랑스문학, 독일문학, 영국문학, 러시아문학, 미국문학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헤세는 이것을 ‘예쁜 보석 상자’에 비유합니다. 근사하고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개성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헤세는 자신이 어떻게 책과 사귀게 되었는지 경험담을 얘기합니다. 소년 시절 수천 권의 책들이 있는 외할아버지의 서재가 헤세의 책과의 만남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어린 헤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빈슨 크루소』와 『천일야화』였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면서 헤세가 해낸 최초의 발견은 18세기의 독일문학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고대 인도의 『바가바드기타』, 중국의 『도덕경』과 『논어』를 만납니다. 이런 식으로 헤르만 헤세의 내면의 의식 세계는 풍성하여져 갔던 것입니다.
헤세는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이며 완전무결한 판단이 아닌 수용성과 진솔함, 선입견 없는 마음자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정보를 얻어 지식을 쌓는 것이 책과의 교제, 독서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에 대한 안목이 있건, 없건, 아무런 편견 없이 모든 것을 하나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즉 그것이 자신에게 뭔가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해 주고 보여주는지, 자기 삶과 정서와 사고를 윤택하게 해주는지, 힘과 풍요와 기쁨과 인식의 새로운 원천을 열어주는 지에 주목할 따름이다. ..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행복과 교양을 위한 필독 도서목록 따위는 없다. 단지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정량의 책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들을 서서히 찾아가는 것, 이 책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가급적 이 책들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늘 소유하여 조금씩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요즘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어떤 책들은 고전문학 필독서라고 요란하게 선전하는 책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헤세도 그런 필독서를 소개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쁜 보석상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나름의 길을 찾으라고 충고했습니다. 헤세도 그렇다면 어떻게 산더미 같은 책들 중에서 자신에게 특별히 기쁨이 되는 작품과 작가들을 골라낼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조언을 합니다.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식물학 도감으로 통해 알게 되었던가? 그렇지 않듯이, 당신이 사랑하는 책들 역시 문학사나 이론적 연구를 통해 찾아낸 것이 아니다. 우선 일상의 모든 일에서 그 본연의 목적을 명확히 인식하는 습관만 들이면, 비록 처음에는 신문과 잡지만 보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서에 대해서도 중요한 원칙을 적용할 줄 알게 되고 분별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헤세가 신문에 대해 고언을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50년, 100년 전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놀라웠습니다. 신문이란 많은 정보를 보여줍니다. 좋은 점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책과는 같이 갈 수가 없다고 헤세는 말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신문은 책의 가장 위험한 훼방꾼 중 하나다. 적은 돈으로 일견 많은 것을 제공해주는 듯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과다하게 잡아먹는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 주제성 없는 잡다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상한 독서능력과 취향을 망가뜨린다는 점은 더 큰 폐해다」
헤세는 책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단지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독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스포츠 뉴스나 강도 살인사건처럼 한동안 너도나도 읽은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가 이내 잊혀지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책은 진지하고 고요히 음미하고 아껴야 할 존재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책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과 힘을 활짝 열어 보여준다. .. 독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세간의 평가와 합치되는지 여부가 아니라, 오직 기쁨을 맛보고 자기 내면의 재산에 또 하나의 소중한 보물을 새로이 추가한다는 바로 그 점이 아니겠는가! .. 탐욕스럽게 전전하는 것은 실속 없고 위험할 따름이다. .. 이런 성급함과 끝없는 사냥질을 하느니 차라리 정반대로 한 작가 한 시대, 한 사조의 작품을 오랜 시간을 두고 섭렵하라. 철저히 알아야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
일부러 느낌표까지 친 문장이야말로 헤세가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헤세가 독자층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 것을 아는 것도 유용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말과 마부의 관계와 같습니다. 책은 이끌어주고 독자는 따라만 갑니다. 두 번째 유형은 반대로 독자는 마부를 따르는 말이 아닙니다.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이 작가를 추적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한다고 헤세는 말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 개인이 어느 한 가지 유형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고 세 가지 유형을 왔다갔다 한다고 합니다.
헤세의 독서의 기술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 말이지만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기이하니, 예술에서도 그러하다. 사랑은 모든 교양, 지성, 비판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가장 멀리 있는 것을 묶어주며, 최고로 오래된 것과 최신의 것을 나란히 둔다. 사랑은 일체를 독자적인 구심점으로 수렴함으로써 시간을 극복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확실하며 그것만이 옳다. 왜냐하면 사랑은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고 증오하는 살인자가 있어도 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옳다고 주장을 할 수 없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을 묶어주며’ 자기 아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헤세가 노발리스라는 작가를 극찬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하고 한편으로는 그 작가에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28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낭만주의는 노발리스와 함께 개화하고 또 시들었다. .. 진정한 낭만주의란 오직 노발리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으니, 슐레겔 형제는 그 심오한 통찰과 섬세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는 불모였기 때문이다. .. 『푸른 꽃』은 시간을 초월하니, 오늘의 일인 동시에 아직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요 또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비단 한 영혼의 이야기가 아닌 영혼 일반의 이야기 인 것이다」
저는 1992년에 꿈에 그리던 제 서재를 마련했습니다. 서재 이름도 학이재(學而齋)라고 지었습니다. 논어의 학이편의 학이를 따고 집 재자를 더하여 만들었습니다. 三如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휘호도 받았습니다. 방의 삼면에 책을 사서 서가에 넣어두고 있습니다만 몇 년에 한 번은 아깝지만 책을 정리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정면에는 도덕경의 16장 일부(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를 土民 선생님의 글씨로 받아 걸어 두고 있습니다. 제 서재를 볼 때마다 죄의식을 느낍니다. 욕심에 책은 많이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헤세처럼 그런 독서가는 아니었습니다. 헤세는 문학적 교양이라고 하면 양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진정한 대문호들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 선두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라고 말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이른바 고전을 별로 읽은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관심을 가진 것은 시집과 시론, 글쓰기에 대한 책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수필집이고 의외로 소설은 별로 없습니다. 검도와 서예에 관한 책이 있고 한동안 기독교 신앙에 관심이 있어서 읽었던 기독교 서적이 꽤 있습니다.
책을 읽는데 저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연필로 줄을 긋지 않으면 도무지 읽은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대개 페이지의 여백에 별표도 그리고, 저자의 생각에 대한 저의 생각을 조금 언급하기도 합니다. 중요하다고 느낀 책은 거의 반드시 요점 정리를 하여 컴퓨터에 저장해 두거나 독후감을 써둡니다. 머리가 나쁜 편이라서 한번 읽어서는 기억이 거의 되지 않고 서너 번 읽어도 기억해 낸다는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최근에 ‘열린 연단’에서 김우창 교수가 한 말씀은 많은 위로와 안도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 그것을 비록 다 기억을 못해도 그것이 우리의 뇌 속에 남아서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헤세가 말한 것처럼 책을 읽은 것이 저의 의식을 넓고 깊게 해주고 비록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살아가는 저의 지평을 더 광활하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