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꽃비
깊은 정적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사방이 물체 속으로 잠입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입을 닫기로 약속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쓸쓸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정지된 그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혼자였습니다. 자신의 기분을 올리려고 해도 차가운 기운으로 인해 더 얼어붙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봄비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부의 침체가 내부의 저조로 이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아는 체 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걸어가지만 자기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 발자국 속으로 들어가면 그래도 피할 곳이 있으리라고 자꾸 들여다 보았지만 옮기는 발자국이 시선을 가로막았습니다. 이제는 정지된 공기 속을 빗금으로 봄비는 내렸습니다. 어디에서도 맞장구를 쳐줄 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벚나무 숲이 보였습니다. 하야면서도 분홍빛이 도는 꽃잎들이 웃는 모습으로 하늘에 달려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지만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꽃잎들은 그가 다가가자 모두 입을 다물고 외면하였습니다. 이제는 어디에 갈 데도 없어서 있는 자리에서 맴을 돌다가 주저앉았습니다. 한 가닥 잡고 있던 줄도 놓아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니 오히려 평안이 몰려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집착할 것도 감정으로 반응할 것도 다 내다 놓았습니다. 마음은 거울처럼 사물을 비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어둠 가운데서도 신기하게 또 다른 어둠이 그의 눈을 덮으면서 그는 그 어둠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무언가 들리는 듯한 것도 같지만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갔습니다. 눈 두덩이 위로 밝은 빛 덩이가 떠오른 것 같더니 이리저리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 빛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가 다가가자 빛은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봄비는 가만히 빛의 움직임을 보다가 뭔가 이상한 걸 느꼈습니다. 자신의 앞으로 한 잎 두 잎 벚꽃의 꽃잎들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로 머리로 등 뒤로 슬로 모션을 보듯이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숫자가 더해 가면서 비가 내리듯이 점점 속도를 더해 갔습니다. 꽃잎들이 눈이 쏟아지듯이 펑펑 내렸습니다. 그 꽃무더기가 그를 온통 감싸 안았습니다. 이 공간에는 꽃비가 빽빽이 들어찼습니다. 그 어떤 것도 들이밀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무더기는 거대한 강물처럼 그의 앞으로 도도히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위에 저도 모르게 올라탔습니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이 그는 벌렁 누워버렸습니다. 하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의 호호하하 웃는 소리가 별안간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습니다. 다시 귀 기울여보다 그런 소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낙화의 강물은 천천히 흐르더니 슬슬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재미있어서 환호하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물론 아무도 그의 소리에 반겨주는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자 그 흐름을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습니다. 봄비는 그 강물 속으로 몸을 더 잠수시키면서 뭔가 잡으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분명히 여기서 떨어져 나가 자신이 어떻게 될지 두려웠습니다. 부등켜 안으려고 해도 꽃잎들은 이미 얼음 같이 차버려서 손을 갖다가 댈 수가 없었습니다. 손톱으로 파고 들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손에는 이미 피가 철철 흘렀습니다. 꽃잎 속에 그의 피가 점점 배어들어 갔습니다.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가고 얼굴과 몸은 백짓장이 되었습니다. 꽃잎의 강물은 어느덧 핏빛이 되어 붉은 강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봄비는 나무에 붙어서 허물을 벗은 나비처럼 대롱대롱 달려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더니 훅 하고 날려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