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어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복면을 한 운명』 김재혁/독후감
시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어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복면을 한 운명’입니다. 처음부터 제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그 출처가 나옵니다. 릴케의 시 「장미의 화반」에서 보면 장미가 쓸어 담는 것이 ‘바깥 세계, 바람과 비, 봄의 인내, 죄와 불안, 복면을 한 운명, 저녁 대지의 어둠, 구름의 변화와 도주와 떠감, 먼 별들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면화 시킨 것이 장미입니다. 이 장미가 쓸어 담은 것 중에 ‘복면을 한 운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면을 한 운명’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김재혁 교수는 왜 허구 많은 제목 중에 이것을 선택했을까요.
복면이란 헝겊 따위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얼굴을 알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쩌면 릴케는 시란 복면을 하고 자신을 감추고 생을 다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김재혁 교수는 말합니다. 「네델란드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인 요한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한 것처럼 시인은 이미지를 가지고 놀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 한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하여 많은 도시, 온갖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물들도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아침에 피는 작은 꽃들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글이라고 합니다. 릴케처럼 직업이 없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업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직업에서 가장 많은 체험을 하게 되고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직업에서 얻은 지식과 느낌에서 시적 모티브를 찾아야 하는 게 더 빠른 길이 아닐까요. 저의 경우는 요양병원에서 눈만 뜨면 운명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것을 시화하려고 시도하지만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절감합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의 건축가이자 예술이론가였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35)는 『회화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가는 그 모든 것을 성실하게 깨어 있는 정신과 눈으로 늘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 .. 빈센트 반 고흐는 ”누구나 금방 모델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 세세한 것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인물을 그리되 인물의 본질적 특징에 맞추어 단순화할 생각이다“라고 밝힌다. 시나 그림에서 하나의 진정한 개성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요즘 읽고 베껴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 그의 ‘숲의 표정’이라는 산문을 보면 세세한 것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숲의 본질만 사유하여 이끌어 내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흐 말처럼 읽어서 금방 알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시란 결국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하면서 세잔이나 고흐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변형시키듯이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릴케는 대상을 묘사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듯이 그대로 본따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이 되는 것을 일거에 습취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릴케보다 약 20년 전에 먼저 태어난 랭보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견자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사의 삶 역시 (프란체스코가 생각했듯이) 그와 같은 저항이다. 다른 사람들의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담벼락으로 둘러 싸인 채 이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려 하는 삶, 바로 그것이다. 내면을 향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을 가난해지지 않는다」
릴케의 글입니다. ‘내면을 향하는 삶’에 저의 정신의 눈이 꽂힙니다. 시인은 수도사의 삶처럼 담벼락에 둘러싸인 ‘내면’에서 자신을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고독이 필요하고 의지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시인의 삶이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시인은 우선적으로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언어와 씨름하고 그리고 끝으로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입지를 설정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방랑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한다. 이런 일련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물의 은총이다. 시인의 입김 속에서 사물들은 무상성(無相性)에서 벗어나 시간 밖으로 목을 내밀고 새로운 공기를 숨쉬며 영원을 꿈꾼다.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크건 작건 내면의 왕성한 힘으로 움직이며 요동친다. 자연에 대한 진지한 느낌, 즉 사물들의 영혼을 읽어내는 것이 릴케에게는 관건이었다」
사물이 무상성(無相性)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사물을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맺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릴케가 말하는 세계내면공간입니다. 자신의 바깥에는 언제나 사물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 사물은 무상성입니다.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사물은 내면에 들어와서 자랍니다. 지금 저의 책상에는 까만 바닷돌의 산수석이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면 그냥 받침대에 있는 수석에 불과하지만 그 수석을 보고 돌의 색깔과 견고함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수석은 무상성에서 벗어나 저의 내면에서 형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시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재혁 교수는 「외부에 있는 공간은 시인의 개입이 없는 한 그저 하나의 텅빈 공간일 뿐이다. 부정적 공간이다. 진정한 “형상”을 만들어 주지 못할 뿐이다」
릴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내면의 공간에 새와 나무의 형상이 없으면 외부에 있는 새와 나무는 나와 아무런 존재도 의미도 없습니다. 외부 공간의 나무가 나의 공간에 들어올 때 나무는 나의 공간에서 자랍니다. 이때 나무는 경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내면과 외부의 공간이 교통하기 위해서 나의 ‘체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려고 억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김재혁 교수는 말합니다.
「시인은 던져진 창과 같다. 온몸으로 날아가며 목표를 향해야 한다. .. 그녀(뮤즈)의 손에 의해 던져져 비행을 할 때만 그의 존재는 더없이 확실하고 안전하다. .. 일상의 무심한 순간까지도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던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해주는 말이다. .. 시인으로서 그의 유일한 행복과 목적은 날아감 때문이다. 날아감은 창작을 하는 순간 그 자체이다」
제가 우연히 만난―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김재혁 교수의 책들을 읽으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릴케를 통해서 부족하나마 조금씩은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막연히 시가 좋아서 시를 쓰네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시적 재능이 없다는 열등감을 숨기고 그야말로 흉내만 내고 지내왔습니다. 시인의 유일한 행복은 창의 날아감 그 자체에 있다고 했습니다. 창작의 희열을 맛보지 않는 한 창은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날아가는 시늉만 하다가 세월을 보낼 것입니다.
시를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가장 멀리는 리듬과 운을 맞춰서 썼고 패러디 혹은 반어법으로 쓰는 시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말장난(pun)을 시적 기교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는 언어로 이미지를 조각하는 것이 주류이지만 그 방법을 안다고 다 잘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릴케의 시창작 방식의 변천을 보겠습니다. 크게 보아 『기도시집』 『형상시집』 『신시집』 『두이노의 비가』 순으로 릴케의 시 쓰는 모습이 변하여 왔습니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시의 구조』라는 책에서 “은유는 더욱 큰 시적 명료성을 획득하기 위해 현실을 흐리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을 보면 묘사에는 서경적 구조,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심상(心像)이라는 것은 이미지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사전적으로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라도 합니다. 즉 현실적으로 있지 않고 다만 마음 속에 나타난 그림입니다. 이 말은 후고 프리드리히가 말하는 ‘현실을 흐리게 만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원관념의 말을 변형•변성(metamorphosis or deformation)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 말은 ‘흐리게’ 나타납니다.
「‘너희 소녀들은/사월 저녁의 정원,/수많은 발자국을 그리며 오는 봄,/아직은 이를 곳이 어딘지 모른다’」
이 시구도 전형적인 은유를 보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형식과 같습니다. 소녀들은 사월 저녁의 정원이다. 소녀들은 수많은 발자국을 그리며 오는 봄이다.
첫째 릴케의 『기도 시집』을 보겠습니다.
「『기도 시집』의 “사물들은 풀을 뜯는 가축 떼와 같습니다”라는 구절에 빗대어 볼 때 시인은 사물을 몰고 다니는 목동이다. 스스로 그는 “나는 황야의 언덕을 지키는 목동입니다”라고 말한다. 릴케의 시의 새로움은 이처럼 시인의 마음 속을 표현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비유와 표현들의 호소력에 있다. “모든 사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그림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한 릴케의 말에 비추어 사물들은 시인의 마음의 표현이다. 릴케의 시에서 이미지가 강한 표현들이 주를 이루게 된 배경이 여기 있다 하겠다. .. 그가 나중에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여행하고 스페인의 톨레도를 구경하면서 거기서 자신의 감정의 대체물들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릴케는 이제 단순히 리듬이나 운을 타거나 시행의 함축적 의미로 시를 창작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대체물로 사물을 구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릴케는 사물을 몰고 다니는 목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릴케는 어떤 시 쓰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까」
릴케는 시 창작방식이 평생에 걸쳐 서너번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주 초기 갓 시를 쓰기 시작한 때의 시들인데 이때는 거의 감성을 그대로 발산하여 릴케 자신이 자신의 시로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그 다음이 『기도 시집』 때의 창작방식입니다. 『기도 시집』의 첫 번째 시를 보면 이른바 차이성을 축으로 한 은유, 즉 심상(이미지)가 대부분입니다. 『기도 시집』 전체가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시간이 기울어 가며 나를/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나의 감각이 바르르 떱니다. 나는 느낍니다, 할 수 있음을,/그리하여 나는 조형의 날을 손에 쥡니다.’
둘째 「중기로 넘어가는 『형상 시집』에 이르면 시의 화자는 수도사의 골방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온다. 사물들을 향한 진정한 바라보기가 시작된다」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세계가 뚜렷이 구별되면서 독립된 개별 사물을 집중 조명하는 면이 앞에서 보았던 『기도 시집』의 첫 번째 시와 다른 점이다」
『형상 시집』의 「서시」를 보면 『기도 시집』의 「서시」와 창작방식은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대상이 기도와 같은 내부 세계에서 현실 세계인 외부 세계로 눈을 돌렸다는 점이 다릅니다.
「서시」 중 은유로 된 부분만 보겠습니다.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나무를 일으켜/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너는 세계를 하나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셋째 시 창작방법에 있어서 그 다음은 『신시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시집』에 실린 대표적인 시들은 초반부의 냉정함이 그 특징이다. 사물이 갖는 속성을 차분한 시선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시인(화자)의 감정 위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인 묘사를 하다가 마지막쯤에 시인의 서정을 살짝 덧씌우는 방식입니다.
「.. 릴케는 독일 시문학사에서 ‘사물시’라고 하는 독특한 시장르를 창출해 낸다. .. 이같은 시적 표현 방식을 극한으로까지 끌고 가서 성공시킨 시인은 유일하게 릴케 뿐이다. .. 보편화된 쉬운 감성에서 예리하고 고통스런 지성 쪽으로 시의 축을 움직여 창출해낸 시인의 에너지의 응집의 결과이다」
「1902년에 쓴 아주 유명한 시 <표범>이다
표범
파리 식물원에서
그의 눈길은 스치는 창살에 지쳐
이젠 아무 것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에겐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움직이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帳幕)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四肢)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가서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김재혁 교수는 말합니다. 시인은 바깥에서 대상을 예의 주시하고 여기는 ‘나’ ‘너’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주관적 감정을 갖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객관적 묘사만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릴케는 이 표범에서 특히 눈과 심장 두 가지를 중심으로 묘사를 전개해 나간다고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김재혁 교수는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상상과 몽상의 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시적 상상력이 필수불가결 하는 것입니다. 이 상상력의 핵심은 바로 메타포(metaphor)이고, 허만하 시인이 말했던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릴케의 사물시를 보면서 릴케의 진면목을 보는 듯합니다. 릴케가 사물(표범)을 본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가 본 것은 ①눈 ②발걸음 ③사지 ④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은 수천의 창살로, 발걸음은 힘의 무도로, 사지는 긴장된 고요로, 심장은 눈으로 들어온 형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각각 은유화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외로 사물(표범)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게 왜 사물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연이 모두 이미지화되어 있습니다. 프랑시스 퐁주의 「비」라는 시와는 전혀 다릅니다. 객관적 사물이란 화자의 정서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릴케는 사물과 대화하고 사물이 되어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런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냥 표범을 대상으로 한 서정시로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시집』이 이른바 ‘사물시’가 갖는 감정적으로 냉정한 묘사와 완벽한 어법은 『형상 시집』에서 엿보이는 시적 주체와 사물간의 동질성의 성향과 대비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시’가 『형상 시집』의 이미지가 강한 시들보다 더 조형화된 미를 띠는 것이다」
청수국
팔레트에 마지막 남은 초록빛 같다,
이 이파리들은, 마르고 투박하고 거칠다.
파란빛을 스스로 띠지 않고 그저 멀리서
반사시키는 산형(繖形) 꽃차례 뒤편에서.
그것들은 울어 지친 듯 파란빛을 대충 반사한다,
파란빛을 일부러 다시 잃어버리려는 것 같다,
그리고 오래된 파란 편지지들처럼 그것들 속에는
노랑, 보라색 그리고 잿빛이 깃들어 있다.
어린아이의 앞치마에 어리는 것 같은 퇴색한 색깔,
더 이상 해질 게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우리는 한 작은 생의 짧음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지만 산형 꽃차례들 중 하나에서 갑자기
파란빛이 새로워지는 것 같다, 초록 앞에서
감동적인 파란빛이 즐거워하는 게 보인다.
사물시인 「청수국」을 잘 이해는 것이 사물시의 핵심에 다다릅니다. 제가 「청수국」에서 본 것들입니다. ‘파란빛’이란 단어가 여섯 번, 직유가 다섯 번 나옵니다. 릴케가 사물(청수국)을 본 본질은 파란빛입니다. 그 파란빛에만 집중하며 파란빛을 ‘감정적으로 냉정한 묘사’를 구합니다.
①팔레트에 남은 초록빛 같다 ②투박하고 거칠다 ③파란빛을 반사시킨다 ④파란빛을 잃어버린 것 같다 ⑤파란빛 속에 노랑, 보라, 잿빛이 들어 있다 ⑥퇴색한 앞치마 같다
이렇게 비교적 감정이 절제된 객관적 묘사만 하다가 반전이 생깁니다. 넷 째 연의 ‘우리는 한 작은 생의 짧음을 어떻게 느끼는가’가 그것입니다. 파란빛의 일생을 인간의 일생에 비유합니다. 다섯째 연에서 청수국의 파란빛이 이제껏 칙칙한 색깔에서 ‘새롭고 즐거운 빛’으로 전환됩니다. 이 「청수국」 시를 보면서 평소에 보아오던 꽃마리의 푸른색에 대해서 이 시를 모방해 보자고 생각해 봤습니다.
넷 째 릴케 인생의 마지막 시기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입니다.
「『두이노의 비가』의 다음 구절을 보자.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며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온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릴케의 장기가 위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음 속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념이 외부의 물체로 구상화되어 확연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추상의 구상화 작업은 릴케식의 직유법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가 평소에 관심을 기울였던 조형예술에의 관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벗어남의 떨림’ 즉 이별의 떨림을 구체적인 사물인 화살이 시위를 떠나기까지의 떨림과 긴장과 힘으로 나타내었습니다. 다시 말해 추상 혹은 구상의 원관념을 구체적인 사물의 등가물로 찾아낸 셈입니다. 이것은 허만하의 시 「물결에 대해서」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균형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외줄 위에 서 있는 곡예사가 하늘 높이에서 한계를 노려보는 물결은 시시각각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가 그것입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심을 갖는 흥미롭고 신비스런 텍스트다. 난해하면서도 시로서 웅장한 음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이 시를 읽는 많은 독자들은 열광한다. 특히 음조 자체가 비밀스러움을 더해 준다. .. 원천적으로 남는 것은 한가지로 흘러가는 시의 음조와 소리뿐이다」
『두이노의 비가』는 왠지 신비스럽고 난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의외로 『형상 시집』의 시나 『신시집』의 시의 창작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김재혁 교수는 「두이노의 비가」 시의 음조와 소리를 처음부터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들은 이미지나 객관묘사가 아니라 리듬이나 운을 주로 하여 어떤 초월적 관념을 얘기하는 걸까요.
「이제 그는 『신시집』의 사물들의 세계를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다 모든 것을 응축시켜 넣으려고 한다. 모든 것이란 자연 풍경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어 공조하는 영역을 말한다. 이 공간이 바로 천사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다. ..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가 바라고 그리워했던 시적 표현의 이데아를 지향한다」
천사의 공간은 초월적 공간이고 이것은 죽음 너머의 종교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릴케가 이데아로 자신의 시적 영역으로 넓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데아는 사전에 보면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플라톤의 중심 개념으로서 ‘이데아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뜻한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각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천국, 극락과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하만하 시인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시도 이제는 감정 혹은 감성에서만 머물지 말고 철학의 세계―형이상학―로 더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를 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 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제1비가에서 시작된 화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뒤로 갈수록 성찰과 명상을 거듭한 결과 나름의 깨달음으로 바꾸어 간다. 그것은 바로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존재 이유에 대한 각성이다」
『두이노의 비가』의 시적 대상이 어떤 것인가 나왔습니다. 존재에 대해 릴케가 시를 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존재’란 철학적인 커다란 주제이기 때문에 저의 실력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다만 소박하게 생각하면 존재란 현실에 있는 것, 그런 대상이라고 할 때 우선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것 그리고 자연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의미, 이유 또는 초월에의 지향성 등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것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면 철학이 될 것이고 시적인 것은 운이나 리듬 혹은 이미지 또는 다른 수사법으로 전개하여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두이노의 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나 이유 등을 노래하거나 그린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오래 잠복해 왔던 백혈병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까지 저는 릴케가 장미꽃을 따다가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걸로 알아왔습니다. 사인이 백혈병이라니 그 당시로는 항암제도 없을 때니 51세의 나이가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너무나도 유명한 묘비명입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쌓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여기서의 ‘장미’는 시 자체일 수도 있으나 시인의 존재, 즉 릴케를 지칭한다고 김재혁 교수는 보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장미 다음에 갑자기 나오는 말이어서 생뚱맞은 느낌이 듭니다. 남들은 릴케를 장미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볼지 몰라도 자신은 모순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릴케가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으로서의 릴케는 그야말로 삶 자체가 이상적이고 또한 명성이 허명이 아닐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시인이었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릴케가 세속적인 것을 경멸한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생 귀족이고 싶어 했다는 것과 여인들과의 애정 문제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이 릴케로서는 약간 아쉽습니다.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하면서 묘비명을 세우는 것이 또한 모순으로 보입니다. 진정으로 익명이고 싶으면 묘비명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익명의’라는 번역에 대해 김재혁 교수는 직역하면 ‘아무것도 아닌자’가 되나 ‘익명의’라고 변역하는 게 좋겠다고 말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익명의’라는 한문투의 말이 문장 중에 튀므로 ‘이름 숨긴 자의’라고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는 글을 씀으로써 거기서 자신의 존재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이 말에 공감합니다. 제가 어줍잖은 시나 산문을 쓸 때 머리 속은 정리가 되고 존재가 안정되는 것을 느낍니다.
「어디 가서 누구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잠시의 짬, 아니면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무료한 시간에도 늘 시만을 생각하고 시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시를 잘 쓰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 실제 저의 자세는 따라가 주지 못한다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습니다. 시를 그저 단순한 취미 정도로만 여기고 소위 시상이 떠오르면 끄적이는 정도입니다. 릴케를 보면서 조족지혈이나마 삶의 형식을 바꾸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 고독, 즉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글은 『말테의 수기』에 나옵니다. 고독은 릴케가 평생토록 동반자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릴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을 받자 대답했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영향을 말한다면 아마도 그토록 많은 나라들, 도시들 그리고 풍경 속에서 나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특별히 많은 사람들과 훤화하는 자리에 가는 걸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고독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혼자서 릴케가 말한 깊은 내면에 잠겨 사색에 잠겨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집 가까이 있는 비봉산을 혼자서 걷는 시간이 마음이 가장 편합니다. 깊이는 없으나 고독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세상 부귀영화니 하는 이런 것들을 멀리 지나가는 구름처럼 스쳐지나 가는 시간이 편안하다고나 할까요. 저의 역량은 이 정도일 것 같습니다.
릴케를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그를 소개하는 책들(주로 김재혁 교수의)을 읽으면 맹인모상(盲人摸象)일지 모르나 저 나름의 소회가 있습니다. 릴케는 정말 고독을 사랑하면서 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릴케 자신의 인생 자체에서 시를 제하면 빈껍질만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생활인으로서 가정을 책임 있게 영위하지 못한 것, 특히 그의 정사(love affair)는 보통 사람이라면 비난 받을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업적이 너무나도 커서 그런 부분을 압도하는 면도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평생 2천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기도 시집』 『형상 시집』 『신시집』 그리고 마지막의 『두이노의 비가』마다 시창작방식이 세계 시사에 남을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릴케는 1926년 12월 29일 새벽 스위스의 발몽 요양원에서 생을 마칩니다. 「오라, 너 마지막 존재여」는 1926년 12월 중순에 썼다고 하니 릴케의 마지막 시였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존재’는 물론 죽음입니다. 죽음을 의인화해서 너라고 부르면서 대화합니다. ‘나는 죽음 너를 인정한다. 나는 네 속에서 타오른다. 너를 오랫동안 거부했으나 네 속에서 타오른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일그러지는 장작 위에 있다. 위안을 위해 더 이상 구할 것은 없다. 추억도 죽음의 순간에 끌어들이지 않겠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정리합니다. 릴케는 죽음 너머의 천국에 대한 기대는 저버리고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을 긍정하고 죽음의 불꽃에서 사라지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생을 고독하게 살면서 오직 시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릴케에 대해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특히 그는 이른바 ‘사물시’라고 하는 장르를 열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집들을 일별하면서 시창작 방법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시가 감성에 그치지 않고 높은 정신의 이념의 세계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세계내면공간’이란 새로운 인식을 제게는 열어주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릴케에 대해 공부하면서 머리 속에 간간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독일어 시간이었습니다. 독일어 박내일 선생님이 저의 이름을 부르면서 누구냐고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손을 드니 이번 독일어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독문학을 전공할 기회를 놓쳤지만 어쩌면 그때 제가 생각을 조금만 달리 했으면 지금쯤 저도 김재혁 교수처럼 릴케를 전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해봅니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