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함의 원동력은 자유이다
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면 어릴 때 들은 기억으로는 그가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산책하는 그를 보고 시간을 알 정도였고, ‘순수이성비판’이니 뭐니 하는 너무도 어려운 책을 쓴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예 꿈조차 꾸지 않은 셈입니다. 백종현 교수의 ‘열린 연단’ 강연을 우연히 보고는 그의 책을 사볼 용기가 생겨서 읽었지만 역시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독후감이 아니라 학생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요점만 필기하는 셈치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백종현 교수의 말씀이고 간혹 저의 사견(파란색 글자)을 첨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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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성(정신)과 동물성(육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칸트적 이성의 관심은 세 가지 물음을 향하고 있다.
①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②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③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칸트는 독일의 동(東)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크(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며, 칼리닌그라드라고 불린다)에서 1724년 태어났다.
-중고 시절에는 고전 라틴어에 심취했다.
-1774년(46세)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이성(reason):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다.
개념(concept):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관념(idea): 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
-『순수이성비판』은 1781년에 발간되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된 지 11년만에 나왔다. 57세 때였다.
-칸트가 임종 직전에 포도주를 조금 마시고 나서 한 말이다. “Es ist gut.” (이 말은 나로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포도주 맛이 좋다라는 것일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8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이 후회도 없이 ‘좋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나는 후자이리라 믿고 싶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Es ist gut.”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칸트의 묘비명의 글귀도 유명하다.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moral law within me.’(내 위의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칸트 철학의 기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고대인은 자연이 무엇인지 물었으며 그러다가 신으로 내려왔고 칸트에 이르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 사상(즉 고대, 중세의 사상과 근대의 과학사상)이 칸트에게 모였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 사상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라고 말한다.
-서양 역사 시대는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눈다. 고대는 진리의 본부가 자연에 있었다. 중세에는 신의 진리의 본부가 된다. 근대의 진리의 본부는 인간이다.
『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 온 것을 계몽사상이라고 한다.
-계몽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정치: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②경제: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③철학: 칸트가 인간의 마음을 진선미성(眞善美聖)의 측면에서 해부했다.
④종교: 신의 이성이 있던 자리에 인간이 이성을 놓고,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을 놓는다.
-칸트는 계몽의 정의로 “사람이 자기 탓인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남”이라고 했다.
-『순수이성비판』---인간의 자발성
『실천이성비판』---인간의 자율성
『판단력비판』---자기기율성. 이 세 가지가 인간의 능력 안에 있다.
-칸트의 3비판서의 일관된 철학적 과제는 인간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이성은 입법자이다. 순전히 자력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원리의 능력을 ‘순수 이성’이라고 일컫는다.
①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의)은 자연세계의 입법자이다.
②실천이성(실천이상비판의)은 도덕세계의 입법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즉 지식이 주요 탐구대상이다.
-『순수이성비판』: 인간의 의식의 지적 작용에서 이론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한다.
『실천이성비판』: 인간의 의식의 의지 작용에서 실천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한다.
『판단력비판』: 인간 의식의 감정 작용에서 반성적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힌다.
-인간의 지식은 오직 감성세계의 대상에 관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통로는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그렇디. 따라서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다.
-지식적 사변으로 지식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생활에서 의미 있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즉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과학자가 도덕군자보다 더 탁월한 훌륭한 삶이 아니다. 칸트는 의식활동에 고유한 영역이 있고 고유의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내가 희망을 갖는 것은 내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다. 무식한 사람이 더 큰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무식하지만 베토벤 음악을 들으면서 큰 감동에 젖을 수 있다.
(의식에는 지식, 도덕, 예술, 성스러움의 영역이 있는데 이 세대는 기술과 연결되는 지식에만 몰두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칸트는 지식, 도덕, 예술, 성스러움의 영역이 있으며 그 의식은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에 의해 물리적(지식적) 신 존재의 증명이 무효화되었다. 그럼 그로써 ‘신’의 의미가 사라지는가? 아니다. 신이 물리적 존재임을 밝혀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신이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신의 현존을 요청한다. 인간의 도덕적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은 그 현존을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신의 존재를 다만 지식적 차원에서 증명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을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필요해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된다. 다만 그런 경우 신의 존재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신이 된다는 약점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자연의 물리학적 신비 등을 고려하면 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백종현 교수는 말한다. 왜 지식만이 인간 삶의 의미의 척도가 되어야만 하나? 지식만이 인간 행실의 잘잘못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하나? 신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인간이 도덕적 행실을 규제하는 것도 자연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이념(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생각)이고, 그 이념의 형성을 위해서는 신의 현존이 요청되는데 그것으로 족하다. 칸트가 사변하여 얻은 결론은 지식에게는 그에 알맞은 지위를 주고 다른 의식의 영역에도 그에 알맞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감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두 가지가 있다.
①우리가 감각 인식을 통해 수용한 것과
②우리의 인식 능력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산출해 낸 것, 이 두 가지이다. 즉 감각인식을 통한 경험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만들어낸 것, 두 가지이다.
-경험 인식의 과정은 두 가지이다.
①감성의 직관 형식인 공간·시간과
②지성의 사고 형식인 범주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는 공간·시간과 범주라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을 한다. 이것을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문서(=인식)을 작성하자면 반드시 먼저 하ᆞ글 프로그림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이 형식이 바로 공간·시간과 범주, 이 두 가지이다.
-칸트가 인간의 인식 형성을 감성과 지성의 형식 두 가지로 나누어 본 것은 철학사의 획을 긋는 일이었다.
-칸트에 의하면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지평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언제, 어디에 있는 것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 하나로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신, 영혼)은 존재 세계에서 사라진다. 신과 영혼은 공간과 시간 상에 없기 때문이다. 신과 영혼은 범주적으로 사고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범주는 오직 공간·시간 상에 나타나는 것만이 타당하다. 공간·시간 표상은 칸트가 도모한 철학혁명의 기수이다.
-공간·시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간과 시간 상에 있다는 것은 크기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는 양화(量化)될 수 있다. 거꾸로 말해 양화될 수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 수학적 역학의 세계만이 존재의 세계이고, 지식의 세계이다.
-뉴턴의 시간과 공간관에서는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 있다. 즉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다.
칸트의 시간관과 공간관에 의하면, 인식 주관인 감성의 형식이다. 즉 주관적 표상이다. 달리 말하면 주체가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인간 의식의 방식에 따른 관념이다. 칸트에게 존재하는 것은 표상이요, 현상이다. 현상이란 인간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칸트의 공간·시간관보다는 뉴턴의 공간·시간관을 나는 믿어온 셈이다. 이 ‘실재’는 내가 죽더라도 죽 계속된다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나의 부모님이 들아가셔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분들의 죽음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더라도 나의 아들, 손주들은 내가 본 그대로의 사물[공간·시간]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실재(real thing)라는 것이 인간이 보든 말든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주제의 자리에 무언가 대상으로 규정하는 인간의 주관을 놓았다. 『순수이성비판』의 경우는 이제까지 대상이 주체의 자리에 있고 인간의 주관이 돌고 있었던 것이 칸트에 의해 주체의 자리에 인간의 주관이 자리잡고 대상이 그 주위를 돌게 된다. 이것을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사물 자체’는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면 내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다만 내가 그렇게 생각[관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칸트를 관념론자라고 하는 것 같다.)
-칸트는 존재자 결정권을 감성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양화될 수 있는 물리적 자연만을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성의 형식인 공간·시간 상에 놓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형식이 공간과 시간이라면 지성의 형식은 범주이다.
범주는 크게 네 가지, 즉 양, 질, 관계, 양태가 있고 또 그 각각은 세 가지 나누어 범주는 총 12가지가 된다.
-통각(統覺)을 바퀴의 중심지라고 한다면 범주는 12개의 바퀴살이다. 칸트의 경우 통각은 깨달음이나 느낌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통일 작용을 가리킨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본 것만이 확실하다. 내가 본 것이 다른 사람이 본 것과 같으냐고 비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본 것이 진짜인지 확인할 방도는 없다. 칸트는 ‘실재’를 말하지만 가능한 인식의 한계 내에서 말한다.
-인식은 존재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활동이다. 세계로부터 들어온 잡다한 자료를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 활동인 셈이다.
-칸트에 있어서 실재는 경험의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불렀다. 실재가 경험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하니까 칸트의 ‘경험적 실재론’은 일종의 관념론이다.
(統覺: 경험이나 인식을 자기 의식 속에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
-우리는 어딘가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생활세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실체를 인간 의식의 통각 작용에 두었다. 인간의 의식이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 잡다한 것들을 통일하여 어떤 사물로 인식한다. 이때 통각이 종합하고 통일한다. 칸트는 동일성의 토대를 통각에 두었다.
-칸트는 동일성의 토대를 나의 자기의식, 곧 통각에 두며, 이 통각이 실체 개념을 가지고 잡다한 감각인상들 안으로 넘어 들어가 그 잡다한 것들을 통일하여 어떠어떠한 사물로 인식한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의식의 초월적 통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각의 초월적 통일에 의해 인식된 사물들의 집합이 자연세계이다.
-자연세계에서 들어온 감각을 시공간의 지평에서 감성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성의 형식(범주)로 정돈(종합통일)한 통각으로 경험한 것을 우리는 인식할 뿐이다.
(내가 사과나무를 인식한 그 관념이 왜 다른 사람과 같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칸트 이론에도 모순은 있으나 현재까지 그것을 넘어서는 이론은 아직 없다고 한다.)
-칸트 철학을 ‘초월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 설명이 구구하다. 그 말은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에 설명이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초월철학’의 이념을 천명하면서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이것이 선천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인식을 초월적이라 부른다”라고 말했다. 이때 ‘초월적’이라는 말은 우리 인식의 사물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인식 능력의 관계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에는 초월이란 사물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의 인식능력에서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다.)
『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행해야 될까? 바로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실제로는 하고 있지 않음을 함의하고 있다.
-이론은 현상을 관조할 뿐 현상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이 일어나면 현상이 바뀐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실천이다.
-이성 중에서 이론이성(지성)은 관조만 하는 이성이고 실천이성은 현실을 바꾸는 이성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바꾸려면 바꾸려는 의지가 원동력이다. 그래서 실천 이성은 의지를 수반한다.
(의지가 있는데 그것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자꾸 옆으로 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의지가 이름뿐이고 그 의지를 불태우는 활력이 있게 만드는 열정이 없기 때문일까?)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감각에 주어진 것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현상 세계에 대한 지식인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이다. 감각 세계, 다시 말하면 공간과 시간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선의 원천 문제가 선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연결된다.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한다. 따라서 도덕의 문제의 중심에는 자유의 개념이 들어간다.
-영혼이나 신은 공간과 시간 상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과 영혼에 대해서 안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교회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영혼과 신인데 칸트는 이 두 기둥을 허공에 띄우려 한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을 경험의 세계 내에서만 활동하도록 제한했고 『실천이성비판』은 이성을 경험 세계 밖으로 향하게 했다. 칸트 철학의 정수(精髓)는 『실천이성비판』이다.
(백종현 교수는 자신에게 오직 책 한권만 권하라고 하다면 『실천이성비판』을 추천하겠다고 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활동이 감각세계를 벗어나도 된다. 따라서 당위 형이상학이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은 감각 세계를 벗어난 지식 체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 형이상학은 없다.
-윤리란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의 이치(당위)이고, 있어야 할 것이 이치라는 이념이다. 윤리 형이상학은 이념학이다.
-당위는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지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당위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 또는 이상(理想)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위는 자연 세계가 아니라 이상 세계의 명제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실천능력이 있는가. 인간에게는 자율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에게는 자율이 윤리도덕의 근거점이다.
-윤리도덕의 근거에 대한 세 가지 이론
①자연주의: 윤리도덕은 인간의 자연본성에 근거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②초자연주의: 신의 명령이 도덕의 근원이다. 신이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③이성주의: 도덕의 원리는 인간의 이성 안에 있다. 이 이론의 대표자가 바로 칸트이다.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이 바로 자율성이다. 자율은 인간 본성, 본질로 칸트가 규정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결정의 능력이 있는 자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 이론을 승계하여, 그 위에 윤리체계를 세웠다.
-의지는 기본적으로 선의지이고 자유의지이다.
-칸트는 자기입법 능력이라는 그리스적 개념에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개념(선의지, 자유의지)을 결합시켜, 그런 능력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인격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 도와달라고 할 때만 나서야지 먼저 나서서 “너의 무능을 채워 줄 게”하고 나서면 안 된다. 칸트는 완성하는 노력은 자기에 대해서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완성시킬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 다른 사람을 완성시킬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월권이다. 반면엔 나는 다른 사람을 되도록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다. 타자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행복 증진에 힘써야 하고 나에 대해서는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떤 행위를 ‘옳다’라고 하는 오로지 그 하나의 이유에서 행하는 것이 선의지이다. 이런 선의지에 의한 행위는 명령을 요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억지로 하기 때문에 명령이 필요하다. 명령에 따라 하는 것이 의미이다. 마치 군인처럼. 다시 말해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법칙을 명령 형식 중에서도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 부른다.
-정언명령(定言命令)은 조건적이 아니고 단정적이다. 정언명령은 아무 조건 없이 “이웃에게 친절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와는 상충된다.
-서양 사회 윤리 전통은 의무론적 윤리관이다. 그 의무가 스토아 사상에서는 자연의 소리(자연주의)에 실려, 기독교에서는 신의 음성을 통해(초자연주의), 칸트에서는 인간의 이성의 울림으로 들려온다.(인간주의)
-한국 사회의 윤리전통은 정을 주고받는 풍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리의식, 의무의식이 약하다. 인간관계가 권리와 의무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정으로 맺어졌다. 정은 인연이 있어야 생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윤리의 근간은 ‘보은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점은 두 가지 윤리(보은의 윤리와 권리의무의 윤리)가 충동한다. 자신의 문제는 보은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남의 문제는 권리의무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한다.
-도덕은 강제된,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자율이니까 규칙을 자기가 세우고, 그 규칙에 자기를 강제해야 한다. 도덕은 자기강제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 강제가 도덕이다.
-칸트는 규칙을 준칙과 법칙으로 나누어 본다. 준칙은 주관적 규칙이다. 법칙은 객관적 규칙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의 수립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이것이 모든 도덕률의 최고원리라고했다.
-도덕법칙은 의무법칙이다.(칸트)
-데카르트는 인식론에 혁명적인 일을 했다. 그 하나가 진리개념을 새롭게 세운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진리개념에는 진리정합설, 진리일치설, 진리합의설, 진리실용설 등이 있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확실성, 자명성에서 진리를 보았다.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라는 인식은 확실하고 자명하다. 여기가 진리의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진리의 일반적 규칙이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발상을 도덕법칙에 대해서도 활용한다. 논리법칙이 자명하듯 도덕법칙도 자명한 것이다.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
-자유가 인간을 존엄하게 한다.
-사람들은 보통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칸트는 반대로 말한다.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즉 자유의 힘이 있다.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의 힘이 있다는 말이다.
-자유의 사용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①자유는 내적으로도 사용된다. 나와의 관계에서의 자유이다. 나와의 관계에서의 자유가 도덕의 기초(준칙)가 된다.
②자유는 외적으로 사용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자유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자유가 법의 기초(법칙)이 된다.
-나의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어떤 구속을 벗어남을 말한다. 내가 있는데 나를 구속하는 것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욕정(libido)이라 했다. 내가 욕정에 사로잡히면 자유가 마비가 되는 것이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기에 또한 경향성을 갖고 있다. 욕정을 갖고 있다. ★자유는 자기의 욕구에서 벗어남이다. 자유는 해탈이다. 그 자리에 도덕이 있다. 자기의 경향성에서 벗어나 의지가 활약하게 되면 선한 행동만 생각하게 되고, 도덕적 행위는 이렇게 생기는 것이다. (자유가 종교적 경지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탐진치/貪瞋癡의 극복]이 이것 아닌가. 자유를 소유하기 위해 평생 목숨을 걸고 수도한다. 내적으로 자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면 필부들은 어떻게 그것을 목표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 낙담이 된다.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 진리가 있으니 올라가는 사람의 신체적 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올라가라는 것 같다.)
-도덕 행위의 최상의 원리가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다. (도덕적 행위의 원리가 자유라고 했는데 이것과는 어떻게 연결되지?)
-칸트는 인간을 항상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행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존엄이란 대체가 안 되는 것이다 존엄한 것은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함은 사람 개개인이 존엄하다는 뜻이고 다른 어떤 개인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오로지 목적이다.
-인간 사회는 ‘목적들의 나라’이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도덕 최상의 원리’이다.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행동은 결코 도덕적일 수가 없다.
-칸트의 모든 개념들은 기독교 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가 경건한 기독교 신자라서 그런지 칸트는 기독교 교리에 얽매이지는 않지만 기독교를 결코 부인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그의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격이라는 것은 꾸밈(가면/persona)에 있다. 왜냐하면 인격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야 한다. 내 속마음은 저자의 것을 빼앗고 싶은데 안 그런 척해야 한다. 꾸밈, 다시 말해 자기통제, 있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를 통제하고 자연 경향성을 억제함에 인격이 있다. 그래서 순자(荀子)는 도덕을 허위라고 했다. 가면이라는 뜻이다. 내 속마음은 저자의 것을 빼앗아 갖고 싶은데 안 그런 척하면서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인격이라는 것은 거짓 꾸밈에 있다. 인격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 것이안. 인격도 이처럼 사실 솔직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인격의 실상을 오해하고, ‘솔직함’과 인격을 혼동하는 것 같다. (이런 게 인격이라니 충격적이다. 정직한 것을 인격으로 생각했는데..)
-자유는 외적으로, 곧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용된다. 누구나 자유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지만, 각자의 자유행사가 다른 사람의 자유의사와 공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을 화해시키고 교정하는 일이 국가의 입법기관이 하는 일이다.
-‘최고선’은 칸트적 이성의 세 번째 물음,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의 답이다. 내가 희망해도 좋은 것은 나의 덕행에 부합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착하게 산 만큼 그에 걸맞는 행복을 희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그것이 항상 가능할까.)
-최고선으로 많은 사람들은 행복, 덕, 해탈 등을 꼽지만 칸트는 “착한 행실을 한 그만큼 행복을 누리는 상태”로 규정한다. 이러한 최고선의 실현은 실천이성 밖에서 이루어진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사람은 4분의 3이 동물적이다”라고 했다. (백종현 교수는 99.9퍼센트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이 동물적 특성에 대한 천착이 없을까? 칸트가 말한 의식의 세 영역 아니 네 영역을 잘 작동시키면 동물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일까?)
-최고선이 서기 위한 조건으로는 영혼불사성과 신의 현존이 요청된다. 칸트의 최고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①사람들은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②그렇게 덕행한 자가 행복을 누려야 한다.
제일 조건이 충족되는 경지를 누구나 이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마음씨가 도덕법칙과 항상적으로 합치하기 위해서는 무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위해 칸트는영혼의 불사성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상적인 상황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영혼]을 억지로 갖다 꿰맞추는 느낌이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움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 영혼은 우리의 감성이 공간·시간 상에서, 지성이 범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최고선[도덕법칙과 행복]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만들어서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칸트의 이제까지의 사유 방식과 모순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행복이란 감성 세계 속에서의 필요요구의 충족인데 그것은 자연세계에서 이루어진다. 행실은 도덕법칙에 따라야 하고, 행복은 자연법칙에 따라 충족되는데 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가 합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여기서 칸트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신의 현존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변한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자연세계에서 반드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건 거칠게 말하면 현실세계에서 착하게 살다가 천국에서 행복을 누리자는 종교의 교리와 어떻게 다른가. 백종원 교수도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칸트는 현실의 기독교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도덕적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연적 경향성(습관적 감성적 욕망)에 있다. 자연적 경향성의 원인은 인간의 신체 때문이다. 그런데 죽으면 일체의 욕구도 사라진다. 욕구가 없으면 욕구충족의 상태인 행복이라는 것도 없다. 죽으면 소망이 있을까. 배고플 일도 없다. 필요요구의 충족으로서의 행복이란 신체를 떠난 영혼에게는 의미없는 개념이다.
(천국에서는 욕구, 즉 자연적 경향성이 없다면, 행복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천국에서는 살아움직이는 유기체인 신체가 없다는 말이다.)
-영혼의 불사성의 요청에서 요청된 칸트의 ‘영혼’이란 어떤 성격인가. 이에 관한 칸트의 사변이 그야말로 변증적, 즉 가상의 유혹에 넘어간 것 같다. 칸트가 영혼 불사성을 주장한 것은 형식적인 논리에 넘어간 것이라고 백종현 교수는 판다는 것 같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영혼의 실체성, 영혼의 동일성을 폐기했다. 그런데 칸트가 요청한 불사의 영혼의 실체성을 회복했다.
-영혼의 실체성이나 동일성을 전제해야 ‘불사적‘이니, ’무한한 시간의 길이‘니 하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죽은 신체와 거기서 나는 그 영혼과 동일하다고 전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체와 결별한 영혼을 무슨 단위로 셀 수 있을까. 영혼의 수효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 칸트의 최고선의 논변에 오면 이 부분이(동일성과 실체성, 욕구충족=행복의 방법) 흐려진다.
-이러한 모순은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고 『판단력비판』의 종교문제로 넘어가면 칸트의 새로운 시선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판단력비판』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끼는가?(『판단력비판』 전반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 후반부)
취미판단
-전반부가 예술에 관한 이론인데 칸트는 예술에 관해 배움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칸트는 전형적인 흙수저이다. 부모가 해준 거라고는 일곱 살 때까지 밥 먹여준 것밖에 없다. 그 다음부터는 성실성만으로 그만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칸트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직 성실성만이 그의 기반이었다. 칸트에게는 재능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사실 타고난 재능은 사람들 간에 별 차이가 없다. 재능은 타고 나는 것이니 곧 운이라고 할 수 있다.
-서른 살 때까지 재능 중에서 발견한 재능에 매진하라. 이것저것 기웃거리지 말고 어느 하나에 집중하라. 이것이 내(백종현 교수)가 오랫동안 교수 생활하면서 학생들에게 해준 말이다.
-『판단력비판』의 과제는 두 가지이다.
①판단력이 선험적 원리를 갖는가?
②판단력이 취미(쾌·불쾌의 감정)의 선험적 규칙을 세우는가?
-판단력은 무엇일까? 어떤 보편적인 원칙이 있으면 구체적 사례들 중에 특정 사례가 이 보편적 원칙의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알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 판단력이다. 가장 비근한 예는 판사가 하는 일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판단력이라 지칭한 것은 ’규정적 판단력‘이라 했고 『판단력비판』에서 다루는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력‘이라 명칭했다.
-판단력이 선험적 원리를 갖는가? 합목적성이란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성격이다. 어떤 사물을 볼 때 이 사물이 어떤 목적에 부하하게 있는 상태이면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를 합목적성이라 생각했다. (내가 어떤 반성적 판단을 한다면 합목적성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 같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개념은 경험개념이다. 경험개념은 대개 대상을 지시한다. 사과, 배, 책상, 의자, 구름, 별, 이런 것들이 모두 경험개념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과의 개념 안에, 어제 본 사과, 홍옥, 부사 등이 있다) 그런 개념을 산출하는 데는 반성이라는 작용이 수반한다.
-반성이란, 서로 다른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떤 공통점에서 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개념의 종류
①경험 개념: 자연의 대상을 보고 만들어낸 개념이다.
②지성 개념: 지성이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것이 범주이다.
③이성 개념: 신, 인격, 존엄성 등 이성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반성적 판단력이 합목적성이라는 선험적 원리를 갖는다고 칸트는 보았다. “착하게 살면 복받는다”라는 반성적 판단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선험적으로(경험에 선행해서) 합목적성을 갖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쾌·불쾌의 감정을 칸트는 다른 말로 취미라고 했다. 취미란 심미의 능력, 다시 말해 미적인 것을 판정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취미라는 말은 칸트의 경우에 아름다움을 판정하는 능력이다.
-판단력이 이러한 취미의 선험적 규칙을 세우는가? 칸트는 그렇다는 것이다.
-합목적성의 원리에 의한 판정들에서 작동하는 합목적성의 원리가 형식적이냐 실재적이냐에 따라 형식적 합목적성(주관적 합목적성), 실재적 합목적성(객관적 합목적성)으로 나뉜다.
형식적 합목적성을 쾌 또는 불쾌의 감정으로 판정하는 능력을 미감적 판단력이라 한다.
실재적 합목적성을 지성과 이성으로 판정하는 능력을 목적론적 판단력이라 한다.
-『판단력비판』은 제1편이 ’미감적 판단력 비판‘이고 제2편이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가 미의 본질을 규명한 것이 아니라 미의 발생을 규명한 것이다. 미 자체가 아니라 미의 원천에 대한 이론이다. 제2비판서는 덕행의 본질이 아니라 덕행이 원천을 해명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칸트의 초월철학도 인식의 본질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명한 것이고 도덕철학도 선의 본질을 해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힌 것이다.
-자연을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이 호수가 아름답다”라고 할 때 ’아름답다‘라는 감정을 유발하는 관점이 있고,
②자연은 체계적이다. 이치에 맞는다는 판정을 내리는 관점이 있다. 자연은 유기적이다. 합리적이다라고 판정을 내리는 관점이다.
아름답다는 감정의 자연의 형식적 합목적성이, 자연의 체계에 대한 감정은 실재적 합목적성이 근저에 있다. 전자는 미감적 판단력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목적론적 판단력에 의한 것이다.
-미감적 판단력의 원리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형식적 합목적성) 이러한 감정은 일종의 쾌감이다.
-쾌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①감관적 감정이다. 감각적 요구가 있을 때 그것이 충족되면 쾌감을 느낀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와 같다.
②미적 감정: 어떤 특정한 감관도 어떤 감각적 요구의 충족도 없는 쾌감이다.
-미적 쾌감은 어디서 생기는가? 미적 쾌감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합법칙적 지성이 합치는 데서 나온다. 지성은 법칙적인 것으로 법칙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자유분방한 것이다. 상반된 성격이 마음의 능력들이 화합해서 미적 쾌감이 생긴다. 여기에는 이루려는 목적이 없다. 이를테면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의 원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미꽃은 빨갛다”는 하나의 인식판단이다. 재료를 눈의 시각작용(감각적 작용)에 의해 그 색이 빨갛다고 판단을 내린다.
“이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하나의 인식판단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장미의 성질이 아니다. ’아릅답다‘라는 술어(판단)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순수이성비판』애서 감성을 지성으로 이어주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했는데 『판단력비판』에서의 상상력은 이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 확연히 구분이 안 된다.)
-자유미: 대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은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미를 자유미라고 칸트는 불렀다.
부수미(附隨美): 어떤 개념 아래 대상에 붙여진 미를 부수미라 한다. 인간미, 지성미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칸트의 미적 쾌감에서 주제가 되는 미는 자유미이다.
-미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아름다움 자체이다. 본질적인 미는 자유미이다.
-어떤 형상은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형태는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어떠한 시각 재료가 있으면 상상력은 그것을 멋대로 조합한다. 그 조합이 어떤 규칙에 딱 맞는 계기, 지점, 각도가 있다. 그때 아름다운 것이다. 특정한 각도에서 본 재료들이 내 상상력에 의해 조합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그때의 형상을 포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순수이성비판』처럼 초월철학이 작용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상상력이 조합되다가 딱 맞는 계기, 각도, 지점을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초월의 순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미적 판단의 한 요인인 상상력은 감성의 한 능력이다. 상상력은 감성의 한 종류이다. 칸트에게는 감성기관으로는 ①감각기관과 ②상상력이 있다. 감각기관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직관하는 능력이고, 상상력은 눈앞에 대상이 없음에도 그려내는 능력이다.
-지성이 판단할 거리를 제공하는 일차적 기관이 감성이다. 상상력은 결국 지성이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내 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도 일종의 감성이다.
-감성과 지성이 합일하는 데서 미적 판단이 나온다고 할 때 감성과 지성은 달리 말하면 상상력과 이론이성에 해당된다.
-상상력과 지성이 합일하는 데서 미적 판단, 미적 쾌감이 생긴다는 설명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을 설명할 때와 유사하다. 감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지성에서 유래하는 개념(범주)에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내가 “이 장미는 빨갛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 장미가 시간상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상에 등장하지 않으면 지성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지성의 규칙인 개념과 감성의 소여를 결합하는 끈이 도식이라는 시간 규정인데 이 도식을 만드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지금·지금·지금…이라는 잡다한 시간 표상을 하나의 연속체로 만든다. 지금은 순간이라 다음의 지금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다. (상상력에 의해) 지나가버린 것이지만 사라져 버리지 않고 남아 있음으로써 시간이라는 연속체가 생긴다. 시간이 연속체이기 때문에, 그 위에 대상들이 잇달아 표상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만물은 오로지 ’지금‘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공간상에만 있을 것이다. 공간은 ’지금‘이라는 시간 표상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시간 만들기 작용을 ’형상적 종합‘이라 한다. (정말 어마무시한 발견인 것 같다. 시간을 이렇게 해석하다니! 이게 사실이라면 시간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유추할 수 있다. 금붕어의 기억 지속 시간은 3초라고 한다. 금붕어는 지금을 세 번 연속하여 상상할 수 있는 능력뿐이라는 말이 된다)
-형상적 종합이란 ’지금‘들인 시간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연속체로 형상화하는 상상력의 활동이다. 이렇게 해서 시간의 지평이 열리고 그 위에 사물이 현상하니까 비로소 지성이 무엇인가를 인식하여 그것의 본질과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
-“아, 시간의 지평 위에 비로소 존재가 드러나는구나.” 이 깨우침이 계기가 되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인식판단에서나 취미판단에서나 상상력의 활동이 필수적이다.
시간의 지평을 열어(상상력에 의해) 인식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의 형상화 작용이, 이번에는 감각적 소여를 갖가지로 형상화하는데 이때 미적 쾌감이 생긴다. 우리는 상상력의 형상과 지성의 규칙이 합치하는 조화에서 흡족함(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이 인식론에서는 시간의 지평을 열었다. 『판단력비판』에서는 상상력이 주어진 감각적 소여를 갖고 상상하는데 그때 미적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때 상상력의 형상과 지성의 규칙이 합치하는 데서 흡족(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게는 명확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나의 우둔한 생각이지만 범박(汎博)하게 말하자면 이런 메커니즘은 아닐까. 예를 들어, 송재학의 시 「애월 바다까지」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길 전체가 목관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청각적 감각과 바다에 짙게 낀 안개인 해미라는 시각적 감각이 만드는 이미지(상상력)가 송재학에게는 부음이었다. 이 형상의 상상력이 지성인 비애와 부음이라는 지성과 딱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칸트의 이상주의-자연의 합목적성
-『판단력비판』의 제2편의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은 자연의 합목적성을 밝혀낸다. 자연의 이치를 판정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자연의 ’합목적성‘이 자연에 실제로 내재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우리의 반성적 판단력은 그러한 원리를 가지고 자연을 판정한다. 그때 자연은 무질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를 가진 것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판단력비판』에 등장하는 판단력, 곧 반성적 판단력이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연결자라고 한다. 『실천이성비판』까지의 칸트를 고전주의자라고 한다면 『판단력비판』의 칸트는 낭만주의의 일원이다. 음악계로 보면 베토벤과 같다. 베토벤도 고전주의의 절정에 있으면서 갈수록 낭만주의적이 된다.
-『판단력비판』은 칸트의 엄밀한 이성주의의 표상이 아니라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 낭만주의로 간다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뜻이다. 고전주의는 말이 되는 이야기만 한다. (『판단력비판』은 어쩌면 논리가 약하다는 얘기 같이 들린다)
-이 즈음에 대세가 낭만주의로 기운다.
-판단력에 의해서 지성의 법칙 수립과(『순수이성비판』) 이성의 법칙 수립이 (『실천이성비판』) 연결된다. 다시 말해 지성에 의해 자연법칙이 수립되고, 이성에 의해 자유법칙이 수립되는데 이렇게 수립된 자연세계에 관한 것과 실천세계에 관한 두 법칙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된다. 판단력은 ’최고선‘의 이념에 의거하여 두 가지 세계를 통일시킨다. (’실천이성 비판’에서 말했던 도덕법칙의 완결을 위한 영혼불사의 요청과 행복의 욕구충족의 자연세계, 이 둘의 연결을 말하는 것 같다)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자연세계는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윤리세계는 도덕의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양자가 합치되려면 자연세계가 윤리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 도덕은 당위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존재는 존재의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두 가지가 합치하려면 자연세계가 도덕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 그런 상태가 최고선이다.
(앞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백종현 교수는 최고선은 ①도덕법칙이 완벽하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요하므로 영혼불사가 있어야 하고 ②행복은 자연세계에서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반성적 판단이 이 둘을 어떻게 연결시키는 작동을 한다는 말인가?)
-선량한 칸트, 아름다운 영혼을 표상하는 칸트의 진심에는 늘 ‘최고선’의 이념이 중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의 물음은 이미 젊은 시절의 칸트의 흉중에 있었다.
-주기도문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생각한다(백종원 교수의 생각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신이 초월해 있지만 말고 하나님의 선이 이 지상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일 것이다. 현실세계는 아무리 도덕법칙에 따라 선하게 살아도 행복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진실로 소망하는 것은 덕행에 알맞은 행복이 함께 하는 그런 세계이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먼저 덕행을 행해야 한다. 그다음에 덕행에 상응하는 복을 기원해야 한다. 이것이 칸트의 진심이다. 내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하면 결국 이 지상이 천국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지상에 세워진 천국, 이것이 칸트가 생각하는 합목적적 세계이다. 이것은 자연(『순수이성비판』)과 자유(『실천이성비판』)가 통일될 때 기대할 수 있다. 자연법칙과 자유법칙이 합치하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일 것이다. (이것을 ‘최고선’이라고 하면 칸트는 결국 그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하다는 말이 되지 않나?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3비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①인간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다.
②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다.
③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④(백종원교수는 지적 안 했지만) 자연세계에서 자유로운 상상력과 합법칙적 지성의 합치에서 오는 미적 쾌감을 향유하는 주체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덕을 실천하고, 인간의 최고선의 희망을 위해 신을 믿고 자연에서 미적 쾌감을 향유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3비판서의 결론이다.)
-칸트의 이성은 이로써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 도덕적 완전성,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칸트의 3비판서의 세계
종합토론
[화제 1] 칸트 철학은 왜 자유의 철학인가?
-칸트의 마음 이론은 지·정·의라는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지는 인식 능력이고, 정은 쾌·불쾌의 판정 능력, 의는 욕구의 능력이다. 지를 성립시키는 능력이 이론이성이다. 이것을 지성이라고도 한다. 쾌감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 판단력이다.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이 실천이성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만을 이성이라고도 하고 있다.
-칸트는 이성을 법칙수립 능력이라고 한다. 입법능력을 이성이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치를 세우는 능력이다.
-인간이 범주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공간과 시간상에 나타나서 감각되는 것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물 자체가 있거나 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공간과 시간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 이성의 활동영역은 감성 세계, 공간·시간의 질서가 있는 세계내로 제한된다.
-이론이성은 자발성을 가지고 있으나 자발성의 활동영역은 감성 세계내로 제한된다.
-실천이성을 실천이성이 되도록 하는 것은 이성의 자율이다. 도덕법칙은 이성의 표상, 즉 이념이다. 정언명령들은 모두 이념이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이념이다.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의지이다. 순수의지를 자유의지라고도 부르며 선의지라고도 일컫는다.
-자유의지 자체는 자연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이념이지만, 이 이념의 활동영역은 자연세계이다.
-반성적 판단력을 마음의 능력이 되도록 하는 것은 판단력의 자기기율이다. 자기기율의 원리가 합목적성이다. 자기기율이란 내가 스스로 내 주관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장미꽃이 아름답다”라고 할 때 아름다움이란 것은 대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취미판단은 주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목적성이란 것은 대상이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지않을 수 없게 나를 규제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자기기율이다. “이 장미꽃이 아름답다”라고하면 그것은 장미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끼도록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을 자유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 의식의 자발성(이론이성), 자율(도덕), 자기기율(미적 인식)을 밝힘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자유임을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 아니면 욕구도, 자기 유한의식도, 죽음도, 즐거움도, 쾌락도, 기쁨도, 슬픔도,숭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니까 위대한 것이다. 그 위대함의 원동력은 자유이다. 동물이면서도 동물성을 극복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유롭지 않다. 모두 필연적이다. 인간도 자연물이니까 인간의 일도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도 인간은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필연적인 인과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힘이 있다. 그것이 자유이다. 그 위대함의 원천은 자율성이다. 칸트는 이 자율성, 자유를 인간의 본질로 파악했다.
[화제 2] 칸트 철학은 주관주의 철학인가?
-칸트의 이론이성 곧 인식하는 지성의 특성이 자발성이라 했다. 이 자발성은 바로 감각표상들을 종합통일하는 것에서 활동한다. 지성은 자기의 개념들인 범주 안에서 주어지는 감각표상을 종합통일하여 하나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에서 하나의 대상이 생기고 이렇게 생긴 대상들의 종합이 자연세계이다. 그런데 ‘대상’이란 그것을 규정하는 주체, 주관과 마주서 있다. 주관이 없는 곳에 대상이란 없다. 따라서 칸트는 주관주의 철학자이다.
-그에 비해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 철학은 객관주의 철학이다. 객관이란 나나 우리가 아닌 타자의 관점,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자의 관점을 뜻한다. 플라톤은 존재자의 관점에서 말하고, 기독교는 신의 관점에서 말하므로 객관주의 철학이다. 객관주의는 자연주의나 신 중심주의로, 세계는 자연을 중심으로 놓고서 또는 신을 중심에 놓고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세계는 인간과는 독립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의식하든 말든 그 자체로 존립할 것이니 이런 것을 ‘실재’라고 한다면 객관주의는 실재론이 된다.
(이 말도 타당하지 않은가. 이 태양계도 50억년인가 되면 소멸한다고 과학자들이 말했다. 따라서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명한 우주에서 인간이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주가 ‘실재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나? 마치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한 것처럼.)
-칸트의 주관주의는 인식의 보편성, 도덕의 보편성, 미적 쾌감의 보편성을 주관의 자발성, 자율, 자기기율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철학이다.
-주관주의 관점에서 세계는 인간의 주관에 의거해 있다. 세계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존해 있다는 생각을 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주관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칸트는 전형적인 주관주의자이자 관념론자이다.
[화제 3] 칸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의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칸트 초월철학의 요체를 가장 잘 드러내 사고방식의 혁명을 말한다. 종래의 실재론의 관점에서 존재자는 인간 의식과 무관하게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주장을 근거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저것은 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는 정도이다. ’나‘라고 하는 인식 주관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앎도 말할 수 없다. 셰계는 오로지 나의 앎의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감각으로 들어온 것을 인식하고, 자율에 의해 도덕을 세워 지키고, 자기기율에 의한 심미안 내지 종교적 희망을 가지는 데까지만 인간이 의식하고 활동할 수 있고 그 이상은 인간의 능력 밖이라는 말이다.)
-칸트에게 지식의 대상은 인식뿐이다. 인간의식 곧 주관의 짝은 존재자나 사물이 아니라 대상이다. 자기를 주(主)로 놓으니까 나머지는 대상인 것이다. 주가 없으면 객도 없다. 여기서 코페르티쿠스적 전환이란, 지금까지 주의 자리에 있던 것이 존재자나 사물이었는데 그 자리에 인간의 의식을 놓아보자는 사고방식의 변경을 뜻한다. 존재자가 대상으로 바뀌었따.
-인식이란 대상세계에 대한 존재의미 부여 활동이다. 칸트의 의식의 초월작용은 존재의미 부여 작용이다.
-나의 인식 주관이 b,k,o,o,라는 소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모아 배열정리하고 종합통일함으로써 하나의 의미 있는 대상(book)으로 만드는 것이다.
-칸트가 기도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해독하자는 발상의 전환이다. 그로써 지식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획득하지만, 그 권한을 자연의 나라에 국한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지식 너머의 덕의 나라에서 이상과 이념을 궁리하게 한다. (인간의 가치에서 지식만이 아니라 도덕과 희망의 세계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終)(2021년 1월 31일 일요일 5:14am 學而재 寓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