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의사들 중에서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면 마종기 시인과 허만하 시인이 아닐까 합니다. 마종기 시인은 1939년에 태어났고 유명한 아동작가 마해송씨의 아들입니다. 연세의대를 나왔습니다. 미국에 가서 방사선과를 전공하였으며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허만하 시인은 1932년에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경북의대 병리학을 전공했고 마지막에는 고신대학 병리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김춘추 시인이 있는데 이분은 위의 분들처럼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1944년 남해 출생으로 가톨릭의대 내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혈액 종양을 전공했으며 그 분야에서 유명한 분입니다. 제가 예과 2년에 대학에 있던 ‘소라동인회’에 들어갔을 때 이분이 아마 본과 5학년인가 했으며 동인회원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분들 중에서도 제가 특별히 관심이 가는 분이 허만하 시인입니다. 허만하 시인은 시인이면 통상적으로 관심을 갖는 서정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문제, 혹은 관념에 대해 더 천착하는 것으로 자신이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집에 서가에 있던 허만하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과연 어떤 식을 시를 썼는지 검토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만하 시인의 첫 시집이 『海藻』입니다. 이 시집은 1969년에 발행되었고 그 해에 제가 구입해서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보니 책의 구조가 지금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우선 첫장이 지금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옛날 책처럼 세로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침표도 지금처럼 까만 점이 아니라 현대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가운데가 비어 있는 점입니다. 책 정가를 보니 300원으로 되어 있네요.
책을 읽자마자 저는 청마와 육사의 냄새를 느꼈습니다. 아! 하는 영탄사는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의 톤이 남성적이고 애상이 별로 보이지 않고 시가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시가 나온 것이 1969년이라면 허만하 시인이 37세 때입니다. 이런 나이에 이런 시를 쓰다니 하고 감탄했습니다. 이 시의 특징은 한문으로 된 관념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감각으로 읽으려면 쉽지가 않습니다. 책의 맨 뒤 겉장에 허만하 시인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고려대학 교수였던 김종길 시인의 언급이 있습니다. 「관념의 형상화와 시어의 밀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시어의 밀도가 높다는 말은 시적 긴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관념어의 형상화는 시인이라면 정말 하고 싶은 능력이지만 누구나 쉽사리 할 수가 없습니다. 제 기억에는 이상(李箱) 시에서 이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작시를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스킬이 있으나 가장 정통적이고 핵심은 은유의 구사라고 생각합니다. 은유란 단순히 말하면 A=B입니다. 허만하 시인은 관념어(추상명사)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연결하여 형상화를 시켰습니다.
「五月」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五月은/十字架의 외로운 重量에 고개드리운/그의 創口에서 흘러나리는 汁液처럼/어두운 懷疑로만 짙어가는가.
중량(重量)이라는 관념어에 외롭다는 이미지가 붙었습니다. 五月은 어두운 회의(懷疑)이다라고 오월(五月)이라는 관념어를 어두운 회의(懷疑)라는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관념어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읽기가 어렵고, 또 어려운 만큼 읽는 재미도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