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by 현목

이어령 교수라고 하면 존경할 만한 분이지만 무언가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위압감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산 것은 확실한데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기억에 확실치 않습니다. 솔직히 그에 대해서는 경이원지(敬而遠之)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그가 췌장암에 걸려 수술도 항암치료도 거부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법정 스님의 죽음도 알게 되어 그 두 분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비교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누렸습니다. 특히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지성의 사람이 지성을 초월하는 종교에 심취한다는 것이 모순 같이 느껴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런 그에게도 인생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따님인 이민아 씨가 이혼을 하고 변호사에서 목사가 되고 5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다가 손자까지 잃었습니다.


높은 산 같은 지성의 이어령 교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보니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책을 사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구입해서 읽어봤습니다. 김지수 기자분과의 인터뷰라서 무언가 일관된 줄거리보다는 산만한 이야기로 전개되다 보니 어수선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의 내용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죽음의 문제, 영성이란 무엇인지, 이 책 여기 저기에서 보이는 시적 발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책을 다 읽고 나서 인간이란 무엇인지―이어령 교수는 이런 대주제를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만―에 대해서 대충이나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런 이원론에 영혼을 더한 삼원론을 주장합니다) 육체는 생각하는 신경계, 심장 등의 순환계, 운동을 담당하는 근골계, 영양섭취를 주로 하는 소화기계, 시각 등의 감각계가 있습니다. 정신은 감성과 지성,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진선미라는 고상한 생각만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정신계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당장 눈앞의 대상으로는 자연계와 기호계, 법계가 있다고 이어령 교수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처한 환경에 따라 혹은 교육에 의해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각자의 살아가는 목적이 다다릅니다. 그저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만 허덕이면서 살 수도 있고 명예나 권력, 부나 정신적 업적으로 향해서 각자의 역량껏 노력하면서 한 세상 살다가 갑니다. 누가 어디에다 관점을 두고 사느냐가 각자의 인생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어령 교수는 2017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으나 이미 전이가 되었다고 하자 수술도 방사선 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2022년 2월 26일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에게 하나님이 ‘기프트’로 주신 것이라는 글쓰기를 하다가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우선 그가 죽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죽음은 의학적(생물학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 현상이 중지되는 현상입니다. 생명이 끝나면 육체는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육체에 의해 발생했던 정신 작용도 소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주관적으로 돌아오면 정신 혹은 영혼이 육체처럼 없어지느냐에 대한 생각은 인간마다 다릅니다.


이어령 교수의 말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어. 그것을 본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의사도 수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퀴블로 로스처럼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일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유사한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죽음이 닥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만큼 죽음이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이란 엄마와 아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을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죽음이란 어찌보면 탄생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이어령 교수는 죽음이 자신의 일로 닥치자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하나는 죽음이란 마지막 순간에 어떤 감각으로 다가올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는 것도 바로 그런 거라네.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무리지어 다니다 어느 순간 딱 필름이 끊기 듯 정지되는 순간. 죽음을 느끼는 거야. 정적이 바로 죽음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한 순간에 느끼는 감각은 바로 정적(靜寂)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어령의 자신의 생의 의미였던 글쓰기로 여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네. ‘사람이 어떻게 끝나가는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야. 내가 파고자 하는 최후의 우물이지. 암이 내 몸으로 번지는 것을 관찰하고 죽음을 하면서 죽음을 직면하기로 한 것은 희망에 찬 결정이란 말일세.”


그러나 이어령 교수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정작 그렇게 멋있는 글을 쓰려고 했지만 글이 안 써지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히려 당황해졌다고 합니다. “글이 안 써져. 읽을 수도 없고. 어떤 글을 써도 평범해. 중학생 학생 작문 같은 것밖에 못 써. 그게 죽음이야.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다 지워버렸어.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였어.” 아마도 병이 깊어가자 육신의 기력도 떨어지고 그에 따라서 정신력도 쇠퇴하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양병원에 누운 환자도 육신의 작동이 떨어지면 정신력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핵심은 이어령 교수가 영성을 어떻게 얻어갔으며 영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이어령 교수와 영성은 무언가 잘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가 영성을 얻기까지는 남모르는 애틋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가 처음에 지성에서 영성으로 간 계기는 자신의 지성으로 치열하게 사고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딸인 이민아 씨의 슬픈 인생사에서 아버지의 한없는 연민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어렵다는 법대를 졸업하고 애 키울 때, 그날 그 바닷가에서처럼 ‘아버지!’ 하고 목이 쉬도록 울 때, 그때 나의 대역을 누군가 해줬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야. 내가 못 해준 걸 신이 해줬으니 내가 갚아야겠다. 이혼하고도 편지 한 장 안 쓰던 쿨한 애가,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면 내가 믿어볼 만하겠다. 그렇게 시작했어요.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눈도 함께 밝아진 거지. 딸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딸의 뒤를 좇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어령 교수는 영성을 어떻게 사유했을까요?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육체와 마음과 영원, 삼원론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삼원론을 ‘유리컵’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체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컵은 우리의 육체이고 물은 컵 속에 담긴 정신이며 물이 비어진 수의 void, 그게 바로 영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컵과 물은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영혼, 즉 컵 속에 있던 void는 사라지지 않고 빅뱅으로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이 공허와 하나님의 영이 섞여서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이어령 교수는 보고 있습니다. 이 void 즉 유리컵 속에 있던 공허의 공간이 신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라고 하면 저는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런 영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살 때도 호의호식하고 싶고 죽어서도 천국처럼 아무런 고통도 없는 그런 곳에서 영원토록 존재하려고 하는 욕심이 지어낸 개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간이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저편의 세계에는 something great가 있다고 믿습니다. 지혜자만이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넘는 지혜로서 영성으로의 다리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것은 그저 어느 날 뚝딱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검도를 수련하듯이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수련의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김지수 기자가 이어령 교수에게 묻습니다. ”평소에 보통 사람은 영성을 어떻게 느낄 수 있나요?“ ”보통은 몰라. 엷은 막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지. .. 그 엷은 막이 뚫릴 때 쏟아지는 영성의 물성을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 .. 그런데 (지하철 기차가) 한참을 가다가 그 지하 굴 어느 순간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듯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야. .. 빛이 물처럼 덮치듯, 신도 그렇게 갑자기 우리에게 온다네.“


우리의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엷은 막, 지성과 영성을 가로막는 엷은 막은 어느 날 갑자기 뚫려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의 순간이고,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믿음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어느 날 갑자기 꽃을 피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영성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흡수할 수 있는 반사판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영성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어령 교수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영성의 한계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모든 사물, 모든 현실 속에는 그런 엷은 막이 있어. 나한테는 그것을 뚫는 게 영성이라네. .. 그런데 나는 그걸 느끼기만 하지 뚫지는 못한다네. 과녁을 맞혔지만 화살이 부러져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지. 내 영성은 그런 정도야. 반면 내 딸 민아는 달랐어. 과녁을 탁 뚫었어. .. 내 화살은 맞추기만 했지 뚫지는 못해. spirit을 감지해도 뚫고 나가지를 못해. .. 그애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았어. ’지금 나가면 3개월, 치료 받으면 6개월‘ 선고 받고도 태연하니까, 도리어 의사가 놀라서 김이 빠졌어. 내 딸 민아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네. ..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쓴 거야. 암에 걸렸어도 영적인 힘으로, 그 아픈 4기가 지나 온몸에 암세포가 퍼지는데도, 두세 시간을 강연했지. 육체가 소멸하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고, 기도드리고 쓰러져서 대여섯 시간 있다가 운명했네.“


이어령 교수는 이민아 씨의 경지로 왜 가지 못했을까요? 그는 끝까지 생각하고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민아 씨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엷은 막을 뚫고 저편으로 건너갔습니다. 자신은 이민아 씨처럼 저 너머의 세계에 깊게 머무는 영성은 없었고 아직도 지성과 이성에 매달리고 있다고, body는 넘었어도 mind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성은 몸의 바깥에서 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고의 바깥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든지, 고통을 통과해서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은 우리의 사유를 초월한 경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어령 교수의 ’시적 발상‘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 이화여대 교수를 오래 했습니다. 그는 논문을 쓰는 국문학자가 아니라 평론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글은 건조한 산문이 주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도처에서 시적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욕심에 여기서 저의 시 제목을 몇 편 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행갈이만 하면 당장 한 편의 시가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시적 발상이라는 부분들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시간에도 무게가 있어. 매일 가벼워지거든.“

이건 시간을 무게에 비유한 메타포에 해당됩니다. 이걸로 시 한편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을 휙 긋듯 한 번이야. 그게 늙은이의 슬픔이고 늙은이의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눈물 한 방울과 이어령 교수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늙은이는 지저분하게 울지 않고 딱 눈물 한 방울입니다.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지금은 은수저, 금수저로 서로를 가르지만 6·25 직후는 다 피난민이었고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어.”

저의 기억에도 1950년대에는 살면서 누가 특별히 부자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피난 통에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했습니다.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이것도 시가 될 것 같습니다.

-”밤사이 내린 눈이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 거지. .. 눈 뜨면 달라진 세상, 그런 경이로움을 문학에서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defamiliarisation)’라고 하네. 그런 면에서 눈과 비는 느낌이 아주 달라. 비는 소리가 나잖아. 밤새 비 내리면 들창에 사납게 들이치거든. 비에는 경이가 없어. 그런데 눈은? 고요하지. 고요한데 힘이 세.“

눈이 고요하고 힘이 세다는 것은 한 행의 바로 시입니다.

-“눈물 한 방울은 구슬이 되고 수정이 되고 진주가 되는 거야. 눈물 방울은 눈물하고는 다른 걸게. 하나둘 셀 수 있어 방울이 되면 음향이 되고 종소리가 되지. .. 눈물 값이 그렇게 비싼 거야.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 준다네.”

이건 행만 바꾸면 한 편의 시입니다. 이어령은 건조한 산문가 같은데 뜻밖에 그의 시적 마인드를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합창하는 개구리들에게 돌을 던지면 순식간에 고요해지거든. 그때 적막을 들었다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나중에 ‘진례의 적막’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시끌벅적한 장례식을 싫어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생애를 과시하는 듯한 화환조차 나는 필요 없다네. .. 죽음이라는 건 없어지라고 있는 거야. 사라져버리는 게 최고지.” 이어령 교수의 장례식이 그의 말 대로였다면 정말 저는 그를 존경하고 감동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보니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장례식을 그대로 했습니다. 물론 그는 장관을 지낸 공적인 인물이다 보니 그의 뜻대로 못한 사연이 있었으리라 짐작은 갑니다. 갑자기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생각났습니다. 그도 이어령 못지 않은 지(知)의 거산(巨山)이었습니다. 그가 2021년 4월 30일 타계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며칠 지나서 NHK에서 비로소 뉴스에 나왔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조촐한 가족장을 치루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취와 세속적인 부귀영화도 다 누린 이어령 교수였지만 그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길을 인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성이 있고 그것은 우주의 시초인 빅뱅과 연결되어 있으며 신의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이어령 교수가 결론을 짓습니다.


”이 한 호흡 속에 얼마나 큰 은총이 있는지 나는 느낍니다.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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