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행복론』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자연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다.“

by 현목

행복론이라면 막연히 세네카의 ‘행복론’이나 카를 힐티의 ‘행복론’ 정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를 힐티 책을 옛날에 읽은 것 같은데 너무 오래 되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세네카의 ‘행복론‘을 읽고 나서는 약간 당혹했습니다. 세네카의 말이 비록 옳더라도 도무지 저에게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책이 2천 년 동안 전하여져 내려왔다는 것이 저로서는 불가사의합니다.


세네카는 스토아학파에 속한다고 합니다. 스토아학파는 제논이 창시하였고 그에 속한 사람으로는 대표적으로 세네카,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이 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주의입니다. 우주의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 로고스이고 이 로고스가 인간에게 있는 이성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을 따라갈 때 우리는 자연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 됩니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에 따라는 삶’을 바람직한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주장의 다른 하나는 금욕주의입니다. 금욕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육체적 본능을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명예나 이익을 탐하는 모든 욕심을 억제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정념이 없는 이러한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했으며, 아파테이아는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서도 동요하지 않는 정신의 의연함과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의 배경이 이렇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과연 세네카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그의 책에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첫째, 세네카는 이성주의를 말하는 것 같은데 ‘미덕이 맨 앞자리에서 기준점을 잡도록 하라’ ‘미덕의 계단을 올라서야만 최고의 선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무엇이 ‘미덕’인지 왜 미덕이 행복으로 이끄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구호만 외치는 격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그저 가부장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으로 되풀이하는 것 같아 읽으면서 공감으로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미덕의 계단을 올라서야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겨도 용감하게 참고 견뎌내며, 인내심을 가지고 맞서 싸울 수 있다.” “또한 모든 고난이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세네카는 말하자면 미덕 혹은 도덕을 계속 말하면서 도덕군자가 되어 절제하고 쾌락을 극복하면서 살라는 말 같습니다. 이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있으나 독자는 왜 그것이 행복을 연결되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미덕 안에 존재한다.“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한 대가로 미덕은 무엇을 약속할까? 신들이 누릴 법한 엄청난 축복을 줄 것이다.“ 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일방적 지시만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책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행복론‘의 대표적 책 중 하나로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둘째, 금욕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세네카는 ’쾌락‘의 이야기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가치 있는 삶의 안내자가 아니다.“ 이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왜 그렇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쾌락을 왜 금기시 해야 하는지, 왜 인간의 존재에 해로운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무조건 쾌락은 나쁜 것이니 피해라고만 주장하는 셈입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먹는 일, 성적인 환희, 노동 후의 안락감,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취 후의 기쁨, 마약, 과도한 성적 탐닉, 명예, 권력, 부의 습득 후의 쾌락, 운동 선수의 운동 후의 쾌락 등등 수많은 쾌락이 있습니다. 행복의 커다란 전제 조건은 즐거움을 느끼고 자족하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모든 쾌락을 금기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네카는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고 소극적이나마 옹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쾌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중하고 극기심이 내재된 것인지 모르고, 그저 쾌락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자신의 욕망을 감싸주고 정당화시켜줄 방패막을 찾아서 날아든 것이다.“ 에피쿠로느스는 인간의 본성에 의한 쾌락을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자제, 금욕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주의가 아니라 금욕적 쾌락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부(富)에 대한 세네카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자가당착적인 면모가 엿보입니다. ”지혜로움이 가난과 직결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자들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행운의 여신이 준 선물이나 미덕의 결실로 얻은 것이라면 엄청난 재산이라도 굳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세네카는 행운과 불운에서 자유하라고 해놓고 돈이 행운으로 엄청나게 들어온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현인이라면 돈이 많아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돈은 행운으로 자기 것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집착을 갖고, 욕망을 갖고 추구하지 않으면 풍족한 돈의 소유자가 되기 어려운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돈이야말로 세속적 행복의 99%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돈은 생명의 불사만 취득할 수 없지 세상의 온갖 권력, 명예, 건강을 다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욕망의 대상을 현인이라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테니까 돈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세네카의 대응 방식이 타당한지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돈이야말로 자칫하면 세네카 그토록 부르짖는 이성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무 위키’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부를 경멸했지만, 모순적으로 어떤 로마의 권력자보다 돈을 사랑하고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특히, 브리타니아(영국)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자산이 3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성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며 욕망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자연법칙, 즉 이성에 따라 살며, 행운과 불운에 무관심하며 자신의 운명에 두려움을 넘어설 때 그는 자유로울 것이고 스토아학파가 이상으로 삼는 ’아파테이아(apatheia)’를 즉 정신의 의연함과 평온함을 향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제 머리속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보다는 군중과 멀찌감치 떨어져 건강한 삶을 회복하려고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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