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유원기∙이창우

행복은 ’지속적‘인 어떤 것이고 행운은 ’가변적‘인 것이다

by 현목

이 책에서 32개의 주제에 대해 유원기 교수와 이창우 교수가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섯 개―행복에 있어서의 탁월성(arete), 불행, 쾌락, 죽음, 우정―정도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탁월성’이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탁월성‘은 그리스어로 arete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덕(virtue)라고 번역했는데 요즘은 탁월성(excellence)라고 번역한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 즉 최고선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잘 사는 삶’입니다. 행복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의 삶은 행위로 구성됩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행위를 모아놓은 것이 삶이기도 합니다. 행위는 좋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행위 중에서 가장 좋음이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의 행복에서 ‘탁월성’이 관건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능 논변’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탁월성’이 왜 행복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기능 논변’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의 좋음은 책상의 기능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좋음은 인간의 기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저자는 인간의 고유 기능을 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섭생기능, 감각기능, 운동기능, 욕구기능, 이성기능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 ‘탁월성’입니다.


‘탁월성’은 감정이 아니라 중용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용의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이성의 일종인 ‘실천적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실제적 상황에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방식을 알려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 방식을 추론하는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숙고’라고 불렀습니다. ‘실천적 지혜’가 숙고하고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깁니다. ‘실천적 지혜’는 원리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상황에서 올바른 추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의 중용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신경을 쓰고 노력을 쏟아붓는 부와 권력(명예)을 행복을 위한 요소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데 조금 더 편할 수 있는 필요조건으로 보지 충분조건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탁월성’은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생기는 능력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습득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탁월성’을 발휘하기 한두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고정된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습성의 탁월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행복은 어느 한 순간에 찾아와서 죽을 때까지 지속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걸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왔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평생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성’에는 ‘습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전자가 감정, 외적 좋음, 사회적 삶이라는 습관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이성이 관조하는 분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지식을 획득할 때 즐거움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사유의 탁월성을 구성하는 부분은 대표적인 것이 학문이고 다음으로는 지성적 직관, 지혜, 제작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습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을 통하여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고선‘ 즉 행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불행에 대해 우리는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과 행운, 혹은 불행과 불운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행운이란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좋은 천운‘이고 불운은 ’좋지 않은 천운‘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지속적‘인 어떤 것이고 행운은 ’가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행운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토 당첨이라는 행운을 만나면 평생 동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불행과 불운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불운은 행운과 반대로 ’좋지 않은 천운‘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행은 불운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행복을 가져다 주는 ’습성의 탁월성‘ ’사유의 탁월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태가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은 ’아레테‘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지 불운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므로 어떤 때는 행운을 만나고 어떤 때는 불운이 닥친다고 했습니다. 만약 행복과 행운이 같은 개념이라면 혹은 불행과 불운이 같은 개념이라면 ’그는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그때 변하는 운을 따라가 본다고 한다면, 동일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비참한 사람으로 부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할 것이며, 그로써 행복한 사람은 일종의 카멜레온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리스트텔레스의 말입니다.


저자는 프리아모스 왕의 예를 듭니다. 그는 한평생 유덕한 행위를 해 왔으며 ’행복한 자’로 선망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왕의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아들이 전투에서 무참히 살해됩니다. 이 불운을 당한 프리아모스 왕을 ‘행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운한 사건들이 강력한 규모로 닥치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을 짓누르고 상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고통을 가져오고 많은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라고 인정합니다.


지금 프리아모스 왕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주 큰 불운은 행복 상실을 일시적으로 일으킬 수는 있어도 불운과 불행은 동일하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슬픔에 빠진 것이 행복 상실이 아니라 ’탁월성(arete)‘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 상실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악덕한 인격으로 인해 악덕한 행위를 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합니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들을 잃었으므로 행복하지는 않겠지만 불운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탁월성’을 실현하지만 불운에 빠진 사람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많은 외적 좋음을 누리면서 ‘탁월성’을 실천하지 못하는 삶보다 좋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것은 ‘탁월성’을 실현해 왔던 사람은 결코 불행한 상태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베토벤은 청각 상실이라는 불운을 만났지만 그는 평생 ‘사유의 탁월성’의 제작인 작곡을 탁월하게 이룸으로써 행복을 누린 음악가입니다. 그는 불운했으나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쾌락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태어난 직후부터 죽기 바로 직전까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느끼거나 의식하는 근본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누구나 즐거움을 찾아갑니다. 쾌락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은 마약이나 성적 탐닉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쾌락은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혹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데서 파탄시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쾌락은 행복의 충분조건입니다. 행복의 정의에도 기쁨과 즐거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행복에는 즐거움, 혹은 쾌락이 필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쾌락이라고 하면 바로 머릿속에 떠오는 인물이 에피쿠로스입니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평생 즐기다가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그것이 아닙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최소한의 필요한 쾌락이 충족되는 것이지 방탕한 쾌락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는 “물과 빵만 있으면 나는 신도 부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최소한의 쾌락만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고 했지 고급 음식이나 사치품, 산해진미 혹은 부와 권력, 명예가 주는 쾌락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욕적 쾌락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불가사의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죽음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고 그런 만큼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신 작용의 일종인―에피쿠로스 같은 철학자는 영혼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만―영혼의 정체에 대해서도 서로 생각이 갈립니다. 플라톤은 죽으면 영혼은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서 윤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영혼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생물의 기능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렛의 죽음관은 생명의 기능이 다하면 영혼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리토텔레스의 철학은 유물론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의사 다음으로 죽음의 현장을 보는 저로서도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사후 세계가 있는지 혹은 죽음 자체로 지구의 물질 속으로 귀속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수련과 소망에 의해 죽음 후의 관념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염원하며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것이지만 용기라는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용기를 포함한 모든 덕은 ‘고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용기는 죽음의 공포를 맞선다고 하는 고귀한 가치를 위한 탁월한 덕입니다. 평생 동안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에 대해 당당하게 대하는 고귀함의 용기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갑자기 오모리엔마사오(小森園正雄) 범사 9단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검은 기술이 아니라 기(氣)다. 기는 거대한 바닷물 위에 반짝이는 물결일 수 있습니다. 의식의 위에서 상대에게 기운으로 지지 않고 당당히 대하고 압도하여 나가는 기력입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이런 기세와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고귀함’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다섯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에서 우정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어로 philia를 우정이라고 번역했지만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등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말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정보다는 친애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형태의 우정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우정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장년층에 흔합니다. 두 번째 우정은 상대에게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으로써 청소년층에 흔한 우정입니다. 세 번째 우정은 이익이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단지 두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격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친구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됩니다. 우정은 삶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고 에피쿠로스도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범위가 광대한 것 같습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행복이고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탁월성’을 통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그는 철학자이면서도 과학자이고 유신론자이기보다는 유물론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서양 학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겠습니다.

저 나름으로 범박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결론을 짓자면 결국 인간은 좋은 성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고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결과물이 아니라― 다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행운과 불운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 그것은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멋있는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식에서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감동 먹고 나도 그래야지 하는 얄팍한 감상만으로는 만사휴이(萬事休矣)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기 위해서는 단단한 의지와 피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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