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虛靜)은 영혼의 정화하는 심리 기제이다
장자(莊子)라고 하면 세 가지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하나는 『장자』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큰 물고기인 곤(鯤)과 큰 새인 붕(鵬)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그리고 장자가 아내가 죽자 항아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모두 깊은 의미가 있으나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요유, 장자의 미학』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대표하는 단어 하나를 고른다면 ‘허정(虛靜)을 들겠습니다. 허정은 말 그대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장자가 이상으로 하는 ’소요유‘에 다다르려면 허정이라는 심리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존재한다면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다 올라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베레스 산에 오르려면 넓은 기초인 산자락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이고 무이며 산으로 오르면서 허정과 절대 자유의 소요유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향유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는 지상의 세속으로 돌아와서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소요유를 위해 우리가 세상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허정의 심리 상태를 유지하면서 세간에서 궂은 일에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장자』는 '내편(內篇)' 7편과 나머지 ’외편(外篇)’과 ‘잡편(雜篇)’ 26편, 총 33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편’만이 장자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편’ 중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소요유(逍遙遊)이고 여기서 처음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곤붕(鯤鵬)이야기입니다.
‘소요유, 장자의 미학’에서 왕카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네 가지로 보았습니다. 도란 무엇인가? 소요유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허정, 소요유가 목적으로 하는 절대자유, 그리고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데 착안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도란 무엇일까요? 도는 결국 존재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계(外界)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이것을 무엇이냐고 연구하는 학문을 존재론이라고 합니다. 서양 철학의 주류라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원인, 스피노자의 실체, 헤겔의 절대정신이 존재론이라고 합니다.
‘도는 원칙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라 순수한 자연의 힘이다. 자연은 도의 본성이고 도와 자연은 동일한 것이다’라고 왕카이는 말합니다. 다시 말해 도는 개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자연‘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의 특성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천(자연 혹은 도)은 인격적이지 않고 의지가 없는 실재하는 천이다, 천은 스스로 있고 억지로 하지 않는다, 천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다가 그것입니다.
도는 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약간 불교의 냄새가 납니다만 왕카이는 길을 비유에서 설명합니다. 길 밖의 쓸모없는 땅이 없다면 길은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길 밖의 무용이 유용한 길의 근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바로 무가 유에 내재하기 때문에 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는 세계의 시작이고 만물의 내재적 근원이다.‘ ’무는 유의 특수한 존재방식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유와 무는 하나이다.‘ ’도는 무이지만 도의 본성은 생성이다. 생성은 무를 유가 되게 한다’
우주의 존재에 대해 가장 보편적인 이론이 빅뱅이론인 것 같습니다. 신의 뜻이든 우연이든 간에 없는 데서 무언가 생겼습니다. 무가 유를 생성한 셈입니다. 우리 인생도 같습니다. 나의 자아가 없는 데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없던 나의 자아와 육신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생명현상과 육신은 사라집니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적어도 피상적일지는 몰라도 현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생성하며 무한순환합니다. 화(化)는 장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만물은 무한히 생성변화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 중에 한 부분일 뿐입니다. 불교의 제행무상을 머리에 떠올리게 합니다.
도의 체득은 개념이나 인지의 과정이 아니라 영혼의 체험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속합니다. 따라서 도를 체득하는 관건은 도의 본성인 자연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왕카이는 도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여 외부 세계를 명명하기 시작했고, 물(物)을 구분하면서 처음 자연과 대립하고 분리되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분리된 존재인 대상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유한한 것이고 도는 무한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언어가 무한한 도를 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로부터 도에 이르려면 뜻(意)과 상(象)을 중개물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은유적 의상(意象) 언어로 전환되어야 도의 경지를 언어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도는 오직 공허(텅 빔) 속에 모인다. 사람은 반드시 이런 마음 상태로 도의 체득으로 나가야 한다. 허정(虛靜)한 마음으로 도를 체험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허정(虛靜)이란 무엇일까요.
허정은 어떤 의미에서 목적지가 아닙니다. 목적지는 절대자유를 누리는 소요유입니다. 하지만 소요유에 이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심리적 상태가 바로 허정입니다. 따라서 허정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정은 한마디로 말해 영혼을 정화하는 심리기제입니다.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장자는 심재(心齋), 좌망(坐忘)을 들고 있고 무공(無功), 무명(無名), 무기(無己)을 말합니다.
먼저 심재는 마음의 재계(齋戒)입니다. 잡념과 욕망을 배제하는 정신 수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재가 감각의 지각을 물리치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에 좌망은 이성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좌망은 망지(忘形)과 망지(忘知)를 포함하는데 형체와 지식의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무공(無功), 무명(無名), 무기(無己)도 결국은 심재와 좌망과 같은 원리입니다. 공명을 목적을 삼지 않는다, 이름이 널리 알려 있지 않다는 것은 허정으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無己)라 했습니다. 무기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면 나를 위주로 하는 평가기준이 달라진다. 이미 사물의 활동이 그 사물의 자연을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천지본연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내가 없으므로 나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영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 상태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정신은 고도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도로 돌아가는 장자의 기본 요구라고 합니다.
장자는 ’내편 인간세(內篇人間世)‘에서 허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첨피결자 허실생백 길상지지 ; 저 공허한 경지를 바라보노라면 텅 빈 마음이 밝아질 것이요, 행복이나 좋은 일은 이런 곳에 머물게 된다.)
셋째 소요유란 무엇일까요.
소요하다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노닐다(한가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놀다)‘는 것으로 됩니다. 소요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가롭다,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편하다가 그것입니다.
소요유는 정신적으로 절대자유를 누리면서 천지와 교류하며 자연 정신, 자연의 영혼, 도의 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소요유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티비의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동기는 순수하나 인간 관계를 모두 끊었고 지성이 결여되어 있고 오직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만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모순되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존환경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소요유를 즐기면서 절대자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장자는 개인의 인격의 독립과 정신의 절대자유의 실현을 인생의 최고의 이상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절대자유도 이상적이긴 하지만 필부(匹夫)에겐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인생에서 역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경계를 넘습니다. 장자는 자연이라는 도를 통해서 죽음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의 시공간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것에 절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자는 천지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여 가는 총체적 순환 과정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은 자연의 다른 표현 방식이다‘라는 말까지 합니다. 이것은 결국 일원론의 존재론에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자 항아리를 두드리고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왕카이의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와 유사한 점이 몇 가지 겹쳤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무기(無己)는 불교의 무아(無我)와 비슷한 것 같고, 그밖에 무, 혹은 제행무상, 일원론이라는 점은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장자는 도의 진리를 자연을 통해 체험하며 허정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심재, 좌망, 무기의 도구를 통해 정신의 정화를 이루고 소요유의 절대자유를 누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수도승처럼 피나는 수행을 해야겠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써 과연 그런 수행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난감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확률적으로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는 것과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쩌면 세상사에 묻혀 남이 하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은지 자신이 없어집니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