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라』 다이닌 가타기리

‘수영을 하고 싶으면 바다에 뛰어들어 마음을 다해 수영을 하라.'

by 현목

다이닌 가타기리(大忍片桐)의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저는 불교에 대해 깊은 지식은 없고 그마저 거의 들은 풍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적 불교의 풍토에서는 조계종(曹溪宗)이 대세이므로 자연히 듣는 것이 그쪽 불교적 용어들로, 연기(緣起), 공(空), 사성제(四聖諦), 삼독(三毒), 간화선(看話禪), 깨달음, 해탈(解脫), 열반(涅槃), 이런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조동종(曹洞宗)의 스님인 다이닌 가타기리는 거의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점입니다.


다만 다이닌 가타기리가 조동종의 정통적인 승려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승려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불교의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한편으로 이 분이 정말 불교의 승려인가 하는 의구심 아닌 의구심이 들기도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이닌 가타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저는 네 가지 정도로 간추려 보았습니다. 첫째가 존재의 개념화 문제, 둘째가 좌선의 의미, 셋째가 삶과 죽음은 하나다라는 것, 그리고 넷째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라’입니다.


첫째 우리 인간은 사물을 분명하게 분별하기 위해 사물을 하나하나 규정하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그리고 또 다시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합니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쩌면 역으로 이렇게 개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닌 가타기리는 인간의 이 ‘개념화‘의 영역을 넘어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라는 개념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우리의 개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 자리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나무를 보듯이 이원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말이지만 결국 삶과 죽음은 개념 이전의 하나라는 사실이 존재의 실재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사물을 알아가면서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오직 자기하고만 연관지어 판단합니다. 개념화는 이원적 세계관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개념화하기 이전의 실재, 혹은 우주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일원론을 주장합니다.


둘째 이러한 개념화의 세계에서 탈피하기 위한 실제의 수행 방법으로 좌선을 들고 있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의 좌선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조금은 당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좌선이라 하면 당연히 화두를 가지고 깨달음의 경지를 가려고 한다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불교의 위대한 선승인 성철 스님의 영향이 큰 셈입니다. 조동종의 좌선은 화두니 뭐니 하는 것은 제쳐두고 그저 앉아 좌선하라는 지관타좌(只管打坐)를 말하고 있습니다. 조동종은 묵조선(黙照禪)을 지향하는데 그것은 ’묵묵히 말을 잊고 본성을 관찰하면 밝은 본성이 저절로 묘한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좌선을 하는 이유는 궁극적 실재의 세계를 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개념화되기 이전의 자아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사물의 본성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오락가락 하는 우리의 정신을 ’그저 앉음‘으로써 가라앉혀야 합니다. 마음이 흩으러지지 않고 적정(寂靜) 상태에서 한 대상에 머물러서 현상을 보고 개념화 이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좌선에서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의 판단이나 가치평가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을 하늘과 구름을 가지고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마음대로 떠돌게 놓아둡니다. 다시 말해 좌선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의 양쪽 측면을 다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사상이 아닌가 합니다.


좌선을 통해 개념화되기 이전의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가운데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를 좌선을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셋째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문제는 인간이 한평생 사는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유한한 생명인 인간에게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죽음도 삶과 따로 떼어내어 이원적으로 개념화하였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속성 가운데 생명의 움직임이 중지하는 죽음이라는 속성이 있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속성 가운데 생명이라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리하여서 생명이 있는 나에게서 생명이 소멸되므로 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한 덩어리입니다. 시간이 차면 생명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죽음은 우주의 한덩어리로 귀환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의 말대로 광대한 대양의 잔물결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내 삶의 전체 상황을 마음속에 담고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실재 존재를 일원론에서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죽음은 실재를 완벽히 실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유로움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라.’ 기독교는 일방적인 계시를 하니까 결국 인간에게 강조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불교도 일응 합리적으로 이치를 풀어나가다 최후의 순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존재를 한눈 아래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본인만의 어떤 확신에 의지하는 것이지 제삼자인 다른 사람은 근처에도 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하면 불립문자라고 했겠습니까. 다이닌 가타기리는 어느 의미에서는 불가지론자 같습니다. 그는 사후도 솔직히 자기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은 오직 ‘바로 지금, 바로 여기’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집중하고 몰두하여 성실하게 살아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수영을 하고 싶으면 바다에 뛰어들어 마음을 다해 수영을 하라. 그 순간 내가 수영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바다라는 생각도 다 사라진다. 오직 수영하는 행위만 있다.’


수영을 했다면 수영하는 행위만이 있어야지 바다가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 자꾸 관념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으로 올라가면 산과 하나가 되어 올라가는 행위만이 있어야지 산과 떨어져서 개념을 가지고 이원적으로 따지면서 산을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합니다. “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사는 방식이다. 새의 삶은 개념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새는 하늘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지만 하늘을 날고 또 날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앞에서 말한 존재에 대한 개념화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기 위해서는 무아(無我)를 강조합니다. 무아야말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내가 있으니까,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아는 자기에서 벗어나는 단초이고 욕망을 극복하는 과정이며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이런 말도 합니다. ‘열린 마음은 병중에 행복을, 가난한 중에 부를, 추함 속에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은 행복 속에 있고, 가난은 부유함 속에 있으며, 추함은 아름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여기를 읽다가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하면 우리는 백퍼센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병중에 행복’이라니!‘ 정말로 이게 가능하려면 무아가 있어야 합니다. 무아만이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좋고 나쁨, 옳고 그름에 매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남들과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라고 합니다. 그럴려면 타인에 대해 항상 연민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그가 누누이 당부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이닌 가타기리는 서원을 가지고 살아라고 합니다. 서원을 가지고 사는 것과 습관적으로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습관은 욕망과 연관되어 있어 어떤 일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그만 둡니다. 반면에 서원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도가 없이 날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의 서원은 네 가지였습니다. 중생 구하기, 번뇌 끊기, 법문 외우기, 불도 이루기가 그것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의식 밖의 한계를 넘는 인식은 모른다고 하고 오직 일원론에 근거하여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만 성실히 살 것을 다짐합니다. 그의 삶의 태도에 한편으로 동의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동물과 식물은 오직 ‘바로 지금, 바로 여기’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없고 존재에 대한 개념도 없습니다. 오직 현재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보다는 동물이나 식물이 행복한 생명체가 아닐까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칸트에서 시작하여 피히테, 셸링, 그리고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은 관념적 원리의 자기 전개로서 세계 및 인간을 파악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들과 다이닌 가타기리의 존재의 개념화의 생각은 너무나 정반대이므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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