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켜니 2023년10월 13일 루이즈 글릭이라는 미국 시인이 80세로 사망하였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미국에서 T.S. 엘리엇이 1948년 노벨상을 받은 후 시인으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72년만에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이 관심이 가서 예스24에서 그녀의 책을 뒤져보다가 『야생 붓꽃』을 구입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시집은 1992년에 발간되었고, 1993년에 시 부분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한 시집이었습니다. 붓꽃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봄에 키가 제법 큰 풀에 짙은 보라색의 꽃이 핍니다.
이 시집을 읽는 도중에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콜론, 세미콜론의 문장부호를 많은 시편에서 사용하는데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시를 읽으면 약간은 혼란에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시편 대부분이 대화체로 이루어진 것은 그 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거기 나오는 ‘나’, ‘당신’, ‘너’가 딱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리까리 했습니다. 화자인 시인 자신인지, 시를 읽는 독자인지 단번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작품해설을 한 신형철 교수의 글을 보고 이해가 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식물의 말, 인간의 말, 신의 말, 세 가지 말이었습니다. 식물의 말은 주로 꽃이름이 제목인 시편에 해당되고, 인간의 말은 ‘아침기도’, ‘저녁기도’의 시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말은 시간 정보가 들어간 제목의 시편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맑은 아침」 「사월」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제목에서도 신의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읽기에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어의 번역문이다 보니 시행들의 어감이 머리에 팍팍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가―나중에 알은 것이지만―행간 걸침(enjambment)들이 계속해서 있어 시행을 이해하는 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행간 걸침은 ‘시어가 앞행과도 연결되고 뒤행과도 연결되게 함으로써 독자의 호흡을 빼앗아 시적 긴장을 일으키는 표현기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너무 광범하게 있어 시를 읽는데 조금은 피곤했습니다. 예를 들어 「야생 붓꽃」 시의 다섯 번째 연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는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 영혼으로/있으면서 말하지/못하는 생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대지가/살짝 휘어졌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내가 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빠르게 날고.//
이 위대한 시집을 읽고 난 후의 유치한 단편적인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생각보다는 메타포보다는 진술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방식으로 시를 읽습니다. 시의 행을 메타포와 진술로 구분하고 그 시 한편에 메타포와 진술이 각각 몇 개인가를 확인합니다. 이것이 시의 내용을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선 저는 이런 시의 구성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루이즈 글릭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메타포가 별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는 루이즈 글릭의 시행들이 주로 진술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시적 목소리(poetic voice)가 몸에 전율을 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는 우선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행갈이를 길게도 짧게도 합니다. 산문시는 논외입니다만. 다음에는 직설적이 아니라 에둘러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메타포를 이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발견으로 이끕니다. 메타포는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만들 수도 있고 여러 문장의 연과 연을 조합항려 만들 수도 있습니다.
루이즈 글릭의 진술들은 왜 ‘시적 목소리‘를 갖게 되는 걸까요? 초보자의 진술은 표면적이기 때문에 대부분 직설적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루이즈 글릭은 진술의 문장을 교묘히 배치함으로써 느낌보다는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로 이끕니다.
셋째, 저만의 느낌인지 루이즈 글릭의 『야생의 붓꽃』을 읽으면서 시인의 ’서정성‘을 완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찾아보니 루이즈 글릭이 시를 쓰던 20세기의 미국은 서정시를 꺼리고 멀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 글릭은 서정시를 초지일관했다고 합니다. 서정시인 하면 세간의 일반적인 인상은 ’뭔지 유약하다‘ ’여성적이다‘ ’자기애적이다‘ ’가련하다‘ 등등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은 이성만이 최고의 경지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루이즈 글릭은 「꽃양귀비」에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것은/생각이 있는 게/아니랍니다, 느낌들:/아, 제게는 느낌이 있어요, 그/느낌들이 저를 다스리지요. 제게는/태양이라 불리는 하늘나라/ 여기서도 행간걸침을 볼 수 있네요.
이 시집을 읽고 다시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6년 9월부터 야생화를 관심을 갖고 기회만 되면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꽃 이름은 ‘모야모’ 앱을 통해 확인했고요. 이 야생화를 가지고 시를 쓰자고 마음은 진작부터 가졌지만 어찌 할지 몰랐는데 루이즈 글릭의 ‘식물의 말’ 기법을 이용하여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실은 루이즈 글릭만의 수법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좋은 시집을 가지고 ‘가리늦가’ 코로나에 걸려 집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정독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