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 우중 산책

'아모르 파티?'

by 현목

토요일 오후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고가 있었다. 잠시 비가 그치는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부채살 모양으로 내려온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우산을 들고 나서기로 했다. 오늘은 집에서 말티고개까지 갔다오리라 생각하였다. 거리로는 한 6킬로, 시간 상 대략 두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을 나와 큰 도로에서 골목길로 접어드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였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비오는 날 일부러 비봉산을 올라가는 일은 없었으니 새로운 경험도 되겠다 싶었다. 빗줄기는 점점 더 세어져 갔다. 비봉산을 오르는 입구인 봉산사(鳳山祠)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올라가는 데가 가파르다. 후덥지근하고 답답하다. 조금 올라가니 얼마 전 봄에 보았던 제비꽃, 꽃마리, 양지꽃, 민들레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솔잎이 많이 떨어져 있다. 소나무의 향기가 가슴 속으로 바람과 함께 들어온다. 냄새는 바람이라는 매체가 없으면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지 못한다. 비가 떨어져 땅을 뒤집어 놓으니 밑에서 황토흙 냄새가 올라온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멀리서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장마비가 맞는가보다. 빗줄기가 하늘에서 마구 들이붓는다. 앞에서 허연 물안개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스물스물 기어가고 있다. 내 발아래에는 빈약하지만 ‘와디’(wadi)가 생기면서 흙탕물이 길을 만들어 가면서 흘러가고 있다.


앞이 잘 안 보이고 숲속에 사람도 없고 으슥한 기분도 든다. 하기야 늦은 오후 이 시간에 비가 이처럼 오는데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다 말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비오는 비봉산을 걷겠다고 결정했는데 여기서 포기하다니 너는 항상 인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힐난을 내가 나한테 했다.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발 아래에서 주먹만한 갈색 덩어리가 움찔한다. 황소개구리다. 그게 그렇게 섬찍한 지는 처음 알았다.


갑자기 걷다가 대학교 예과 때 생물학 실습시간에 현미경을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처음 짚신벌레를 보았다. 짚신벌레는 움직이다가 무언가 부딪치면 돌아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간다. 또 장애물에 닿으면 마찬가지로 방향을 튼다. 그것을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고 부른다. 나는 내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 장벽을 만났을 때마다 의지를 가지고 잘 뚫고 나가지 못했다.


비봉산 정상에 올랐다. 비는 여전히 작심하고 내릴 모양이다. 신발이 이미 젖었다. 이 비 오는 풍경 속에 나 혼자 인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기는 한 모양이다. 우산을 쓰고 옆으로 지나간다. 갑자기 빗소리와 산속의 향기 속으로 내가 뚫고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안경이 뿌옇게 되어 앞이 잘 안 보인다. 손수건으로 닦았다. 내가 인생의 장애를 잘못 넘은 것은 내 앞의 풍경에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던 건가? 안경을 닦으니 이렇게 잘 보이는데 나는 외부 환경만 탓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개망초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개망초만큼 무시당하는 꽃도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와도 아는 체를 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장삼이사가 다 개망초 같은 신세가 아닐까? 저 잘난 맛에 산다고 거들먹거리고 한 세상 살지만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소나무 잎에 물방울이 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물빛이 영롱하다. 반짝인다. 소나무 잎은 왜 하필이면 뾰족할까? 가시모양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유가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비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간간히 흩뿌린다. 중도에서 그만 두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벚나무 숲에 도착하였다. 20년 전에 여기 비봉산을 처음 올랐을 때 이 벚나무는 막 묘목으로 심겨져 있었다. 그 나무가 길을 가운데로 두고 서로 팔을 벌리고 안고 있다. 줄기가 내 한 팔을 넘쳐난다. 20년의 시간이 그 줄기 속에 담겨 있다. 봄에 만개했던 꽃잎들이 까만 갈색이 되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다.


멀리서 뻐꾸기 소리가 괘종시계처럼 울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 정서로는 뻐꾸기는 ‘오빠 생각’과 연동되어 슬프게 들리게 되어 있다. 까치와 비둘기가 후두둑 날아오른다. 갑자기 내 귀는 새소리에 귀를 모은다. 찌르륵, 칙칙, 까악 까악, 찌이익, 책책, 후이오, 휘이익…. 우리 귀가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들려도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우리는 자기에게 관심 있는 소리만 듣게 되어 있다.


다시 소나무 숲이다. 나무들이 다 장신이다. 사람이나 나무나 다 키가 큰 것이 멋이 있어 보인다. 벌써 귀티가 나는 것 같다. 의외로 초입이라 그런지 소나무 냄새가 별로 나지를 않는다. 길가의 무덤을 뒤로 두고 계속 걸었다. 목적지인 말티고개가 거의 다 왔다. 등성이에 빽빽한 대나무 줄기 사이로 그 아래 차들의 굉음이 폭포소리처럼 빠져나오고 있다. 흘낏 지나다 보니 아카시아 나무가 보인다. 어릴 때는 아카시아 나무가 흔했는데 별로 이용 가치가 없다고 해서 베어버려서 그런지 별로 눈에 띄질 않는다.


다시 발길을 돌려서 집으로 향하였다. 빗속에 젖은 신발 속의 발가락에 물이 생겼는지 왼발이 불편하고 쓰리다. 소나무 껍질을 만져 보았다. 두툴두툴하면서 비가 와서 그런지 미역처럼 미끈거린다. 솔잎을 손바닥에 대어 보았다. 바늘들이 손바닥을 지긋이 누른다. 설마 그들이 하늘에 대고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풀도 둥근 것은 부드럽지만 길게 나 있는 것은 만지니 까칠하다.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던 개구리 울음 소리가 혀를 굴리듯이 계속 내면서 산을 보채는 것 같다. 지나가다가 풀을 건드리니 갑자기 소리를 멈춘다. 소나무의 순들이 남쪽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고 있다.


내 앞에서 메추라기가 갑자기 후두둑 날아 올라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진다. 걷다 보니 조그만 액자만한 풍경 속으로 멀리 남강이 돌아서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오던 길에는 못 보았었다. 이제 나도 내려가는 내 인생에서 올라올 때 못 보았던 것이 무엇일까? 눈에 떡갈나무가 보여 잎을 따서 만져보니 습기가 없는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렸다. 모두들 초록의 진함 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데 부러진 나무가 그 속살을 허옇게 내보이고 있다. 부러진 인생이 우리라고 없을까마는 왜 그랬을까? 종자가 나빴을까? 심겨진 자리가 운이 없었을까? 주위의 나무가 너무 왕성하여서였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였을까?


젊어서는 몰랐던 운명이란 말이 늙어갈수록 마음에 짙은 그림자를 낳는다. 니체 같은 형님이나 운명을 사랑할 능력이 있겠지 나 같은 좀팽이가 감히 운명을 사랑한다고 능청을 떤다는 건 주제 파악을 못한 것이다. 적어도 그런 짓은 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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