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국제 음악당을 다녀와서

넥타이를 매야 할 때는 매야 한다

by 현목

우연히 점심 식사 시간에 C선생님이 통영이 자기에게는 나폴리 같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통영엘 가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그 동안 시간이 나면 주로 남해섬을 많이 찾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런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가깝기도 하고, 가면 한적하여 유유자적한 면이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통영을 몇 번 방문하여 시장 근처에서 도다리 쑥국을 먹는다든지 하는 일이 몇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도시가 너무 복잡하고 어수선하여 별로 다시 찾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남해가 아닌 다른 곳 통영을 가보자는 마음이 생겼던 겁니다.


특히 통영 국제 음악당은 생소했으나 홈페이지를 찾는다든지 또 미리 한 차례 방문하여 길을 익혀두고, 이번의 파질 사이(Fazil Say/터키 출신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리사이틀 예매권도 구입하여 준비를 하고 거의 한달 넘게 기다렸습니다. 통영에 윤이상의 기념관이라든지 행사가 있다는 건 신문을 통해 얼핏 들어왔지만 실제로 국제 통영 음악당에 윤이상 관계의 시설과 행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윤이상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음악과 이념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면 그런 것이 좋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하면 무방하리라 봅니다. 사실은 윤이상은 저와 관계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분은 부산의 P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그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습니다. 작사는 청마 유치환 선생님이 했습니다. 저는 학교 다니면서 내내 그 교가를 불렀고 졸업하고 동창 모임에서도 꼭 부르면서 자부심도 가졌습니다.


그분의 처지를 한편으로 이해는 갑니다. 어쨌든 동백림 사건으로 인하여 수사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으리라 생각이 되고 저라도 반감을 가졌을 것이고 어쩌면 그 반동으로 북한 친화적인 인사가 되었으리라 상상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반국가적 행위를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그의 음악적 공적은 이것과는 별개입니다만.


주차장 사정을 몰라서 진주에서 조금 일찍 출발하여 도착하니 12시가 못 되었습니다. 3시에 시작하는 리사이틀이니 너무 일찍 온 거지만 대신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음악당의 건물이 특이합니다. 지붕이 마치 비상하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음악당에 가보면 이쪽을 봐도 바다, 저쪽을 봐도 바다입니다. 정말 이런 입지에 음악당이 서 있는 데가 과연 세계에서 몇 군데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건물 앞에 붉은색의 8분 음표가 기념물로 서 있는 앞에서 서서 기념 사진도 찍어보았습니다. 음악당을 내려가서 보니 요트들이 보여서 가보았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바닷물의 물결이 잔잔하고 여기저기서 요트를 고치는 사람들의 작업복이 보였습니다. 요트는 뭔가 부의 상징 같아서 좀처럼 다가가기 쉽지 않지만 음악당 주위에 요트의 그림들이 쳐 있는 것도 음악당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일조를 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음악당 내에 있는 뜨라또리아 델 아르떼라는 음식점에서 아는 이름의 ‘봉골레‘를 먹었습니다. 도중에 어깨에 까만 가방을 걸치고 허리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파질 사이였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러 온 모양인데 혼자서 다니는 것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적어도 음악당의 관계자의 안내라도 있지 않아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어쩌면 이 음악당과 너무도 친숙하여 자신이 혼자서 다 처리를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식사 후에는 음악당을 내려가 음악당을 끼고 해안을 돌아가는 산책길을 아내와 거닐었습니다. 여름의 초입이라 더웠지만 다행인 것은 그날은 비가 오려고 해서 흐린 탓에 견딜만은 했지요.


드디어 시간이 되어 음악당에 들어갔습니다 매표소 바로 위에 전면 거대한 벽에는 이 고장 출신의 전혁림 화백의 그림―손바닥 크기의 정사각형 접시에 그림을 그린 것을 천장 정도 합쳐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구성했습니다―이 걸려 있었습니다. 멋은 있어 보였지만 문외한이라 어떤 특별한 감흥은 없었습니다.


콘서트 홀에 들어서자 오케스트라의 무대 뒤에는 합창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간이 있었고 좌우로는 외국 콘서트홀에서나 보았던 발코니식 관람석이 붙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무대 중앙에는 Steinway-Sons라는 피아노가 놓여 있는데 제 감각으로는 왠지 피아노의 가로 폭이 다른 것에 비해 좁은 것은 아닌가 했습니다.


음악회가 시작하자 파질 사이는 까만 옷으로 차려 입었습니다. 아까 보았던 촌부 스타일과는 판연했습니다. 쇼팡의 녹턴 세 곡과 베토벤의 비창, 에릭 사티의 6개의 그노시엔느, 파질 사이의 The Art of Piano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음악적 평가는 제 능력 밖이라 언급하기가 저어하고, 단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듣는 소리와 오디오 스피커(저의 경우는 오래된 에딘버러입니다만)에서 나오는 소리와 지금 여기서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게 확실히 차이가 나는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청중의 수준을 제가 논할 입장은 아니나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양복을 입거나 넥타이를 맨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집밖에 볼일 보러 나갈 때나 입을 법한 티셔츠 차림도 종종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닌데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꼭 외국 관습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데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외국의 콘서트장에 관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복에 넥타이 혹은 보우타이 차림입니다. 그것은 딱히 그런 옷을 입어서 위세를 부리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자리의 격에 맞는 모습이 있습니다. 상가에 가면서 검은 양복을 입지는 못해도 적어도 빨갛고 노란 옷을 입고 가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예라고 합니다.


박이문의 『논어의 논리』에서 보면 ‘예는 별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에 가까울 만큼 몸에 밴 습관화된 인(仁)에 꼭 맞는 태도, 몸가짐, 그리고 행동에 불과하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을 우리가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도록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습관화되기 때문에 위선적이 될 수 있는 약점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거의 자동적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콘서트 홀에서의 예도 연주자를 배려하고 그를 존중한다는 마음을 우리가 나타내야 한다면 우리의 복장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연주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유럽 사람들이 먼저 시작했고 또 그들이 그들 나름으로 예를 나타내는 형식을 만들었다면 후발주자인 우리도 그런 양식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 민족은 ‘동방예의지국’이다라는 말을 들어왔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경험해 보면 그것은 많은 허점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해방후에 급속히 나라가 발전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습니다. 거리의 교통질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 콘서트 홀까지 그다지 예의 있는 모습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일본 방송을 자주 보는 저로서는 한국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일본 사람들의 것을 비교하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적어도 예의라는 면에서는 아직은 우리가 못 따라가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의라는 것은 고리타분한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인간에 대한 인, 배려, 혹은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금 정리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하긴 저도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한 에피메니데스 같은 처지가 안 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