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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Jun 23. 2024

『노장사상과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 이강수



  2017년에는 장자에 관한 책을 여섯 권쯤 집중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도 그때 책이지만 읽고는 요약만 했지 독후감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장유의 카페거리에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이란 책방에서 북토크로 『장자 강의』를 쓴 전호근 선생님의 강의가 있다고 하여 옛날에 읽은 책들을 요약한 것과 독후감들을 다시 복습해 보았습니다.


  『노장사상과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 책은 페이지 수가 191이 되는 비교적 소책자입니다. 저자는 2022년에 82세로 작고(作故)하였습니다. 이강수 교수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사회에서 노장사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사실 이것은 생각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박이문 교수(87세로 2017년에 작고하심)는 『노장사상』에서 노장사상을 도(道), 무위(無爲), 소요유(逍遙遊)의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노장사상은 위대하나 인간이란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한계 내에서 노장이 주장한 사상 대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강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이강수 교수는 네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그의 생각을 전개합니다. 첫째는, ‘생명의 소중함’입니다. 그는 자연계에서 (氣)가 전개되어 바람이 되듯이 인간에게도 기가 전개되면 기력과 기개, 희로애락 같은 감정이 되어, 결국 인간은 기를 받아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분히 추상적이이서 과학적인 설명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성향은 욕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욕과 성욕입니다. 이는 생물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구 주체는 감각기관과 사유기관, 그리고 본래적 자아가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욕구를 충족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욕구는 한량없으나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물질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생명을 가꾸고 기르는 것을 양생(養生)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자연스런 삶을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양생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장자는 양생을 잘 하려면 익생(益生)―생명에 군더더기 붙이기―을 하지 말고, 굳이 장수하려고 하지 말고, 노형출심(勞形怵心)―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졸인다―을 삼가고, 정력을 소모하지 말고 사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염담(恬淡)과 허무와 무위(無爲)와 평이(平易)의 생활이 양생주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물욕 없이 호수처럼 맑고 잔잔하고 깨끗하면서도 가없이 텅 비어 있는 하늘처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저절로, 스스로 우러나오는 대로 행하여 덕을 매개로 천지와 합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멋있는, 어쩌면 합당한 사상을 머리로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 사실 느낌이 확실하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둘째는, ‘참다운 자아를 찾아서’입니다. 사람들은 욕망의 본체입니다. 그들은 남보다 더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사적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 ‘사적 자아’는 자기 보존을 위해 부와 권력과 지식을 무기로 삼아 남과 다투고 싸우기도 합니다. 


  노장은 세속적인 학문으로는 진리를 밝힐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밝히고 참다운 나를 찾으려면 생각을 바꾸어 마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세상 말로 인생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 공부를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노자는 허정(虛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도덕경 1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致虛極, 守靜篤.萬物並作, 吾以觀復.(허를 극에 이르게 하고, 정을 독실하게 지켜서 만물이 다 같이 성장·발전할 때 나는 그로써 되돌아감을 본다) 저도 한때 이 어구가 좋아서 토민 전진원(土民 全瑨元)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행초로 글씨를 써서 제 서재에 붙여 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비워서 고요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지눌(知訥) 스님이 말한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과도 상통하다고 봅니다. 세상은 공하니 고요함을 견지하여 영명스러운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외물에는 눈을 두지 말고 자신의 내부를 돌아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廻光返照).


  인간이 자기 위주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물관지(以物觀之)’라고 하고, 근원적, 전체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생각 바꾸기에 해당합니다. 살아가면서 언제 부딪치는 사건, 사태들에 대해 우리는 누구나 자기 위주로, 자기이익 위주로 보기 쉽습니다. 이때 생각을 바꾸어 『장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대붕(大鵬)과 같은 안목으로 볼 수 있다면 장자가 그토록 말하는 염담(恬淡)과 평이(平易)의 혹은 소요(逍遙)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노자가 허정을 이야기했다면 장자는 성수반덕(性脩反德)(습성에 의하여 물든 심성을 닦아야 한다)을 제시합니다. 장자의 성수반덕의 공부는 전일(專一), 심재(心齋). 좌망(坐忘)이 있습니다. 전일은 정신을 집중하여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고, 심재는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좌망은 일체를 잊는 무아의 세계로 몰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양함으로써 참다운 자아를 찾아갑니다.


  셋째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입니다. 이는 이강수 교수가 책 제목으로 제시한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자기 재덕(才德)을 나타내지 않고 세속과 잘 지내야 합니다. 이것을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므로 대부분 물질에 휘둘리며 한평생을 사는 셈입니다. 물질을 주체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불교는 참선이라는 수행방법을 수련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비웁니다. 도가(道家)는 생각을 바꾸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노장이 말한 도와 무위와 소요의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해 유가(儒家)는 인화(人和)를 말합니다. 유가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도덕성을 통하여 인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장자는 천화(天和)를 말합니다. 천화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노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이 그것입니다. 

  넷째는, ‘평등과 자족’입니다. 유가의 중심 덕목은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을 베푸는 데는 평등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와 다른 이의 아버지에게 인을 보이는 것이 같을 수가 없어 결국 경중(輕重과 후박(厚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고 차이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적 자아입니다. 이 사적 자아를 없애야 사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오상아(吾喪我)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나는 변화하는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참된 나를 찾는 것은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교의 무아에 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족(自足)이란 욕구 충족의 대상을 자기 밖에서 구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족에 이를 수 있을까요? 세속적으로는 흔히 오복을 듭니다. 대개 지성인들은 이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록 오복이 완전치는 않을지 몰라도 세속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평상인들에게는 상당 부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한 느낌을 가질 확률은 높다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와 부를 얻게 되면 쾌락 내지 자족을 느낍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온통 이것에 환장하여 SNS나 Youtube에 올리고 난리입니다. 반면에 장자는 무위에 이르러야 진정한 쾌락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머릿속으로 이해는 가지만 과연 평상인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문스럽습니다. 무위는 자연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인위적, 문화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무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티비에 나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자족이라면 장자의 주요 키워드인 소요유(逍遙遊)애 대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거기에 대해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무위를 지향하면서 어떤 것에 구속되지 않고 그저 노니듯이 산책하는 것입니다. 저도 인생에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저 자기의 몫 대로 선하게 살다가 가면 그것으로 다하는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천당에 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영적인 이기심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강수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노장사상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두 가지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는 오상아입니다. 내가 나를 잊는 것 즉 무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노자의 허정의 수양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강수 교수의 노장사상에 대한 설명은 중요한 부분은 모두 짚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이 소책자라서 그런지 무언가 현실생활에서 지표로 사용할 수 있는 실천적 요소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장은 플라톤이나 기독교, 불교처럼 이원론적 존재론이 아니라 현실과 실체가 하나인 일원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장자는 세상사를 산책하듯이 즐겁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걸 머릿속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잘 못합니다. 세상사 즐겁게 사는 것은 맛있는 것 먹고, 돈으로 즐길 수 있는 온갖 쾌락을 누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게 아니라 목적 없이 거니는 소요, 산책에서 즐거움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하는 데 그다지 지장이 없다면 그것도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리고 병마에 고통스러울 때도 그런 마음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죽음을 산책하듯이 즐겁게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강수 교수와는 내공이 비할 바도 안 됩니다만 제가 이 책을 읽고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마음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허정과 전일, 심재, 좌망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돈오점수(頓悟漸修)할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이입니다.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 시시한 것, 허름한 것―훌륭하고, 멋지고, 거대한 것이 아니라―을 가지고 한마음(專一)으로 집중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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