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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Jul 11. 2024

좁쌀 영감의 변명

  요즘 도올의 책이나 유튜브를 보는 편입니다. 도올은 연배가 비슷하여 처음에는 조금 관심이 있었으나 거의 잊거나 외면하였습니다. 최근에 기독교에 대한 서적을 몇 편 보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와는 성향이 달라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으나 분명히 그의 해박한 지식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쌍소리 잘 하고, 화 잘 내고, 잘난 체하는 버릇은 여전하나 워낙 그의 지적 능력에 압도당하여 그쯤은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디선가 그의 글에서 『파이돈』에서 나온다고 기억하는데 도덕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도덕은 ‘용기, 자기절제, 정직’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기 정화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공감이 가면서 자연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주 정직하지는 못합니다. 좋게 말하면 정직한 편이라고나 할까요. 자기절제도 잘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자기절제를 아주 못해서 성격파탄을 일으킬 정도는 못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의 결점은 용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에 맞부딪치면 그것을 단단한 의지를 갖고 꿰뚫고 나가기보다는 주저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사태를 유야무야(有耶無耶)로 깔아뭉갠 적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학 들어갈 때부터 당시 제일 좋은 대학이라는 데를 도전하기보다는 적당한 대학을 골라서 들어갔습니다. 대학생 시절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으면 세상 두 쪽이 나도 달려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거절 당할까 봐 꼬리 내리고 다니는 꼴이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겠다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개업하면서도 쪽박을 차는 한이 있어도 대출을 내어 병원을 확장해서 남들이 보란 듯한 병원장이라도 되겠다는 꿈은 하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만족했다고나 할까요. 전문의 과목 결정을 할 때도 사실은 정신과를 해보고 싶어서 선배에게 상담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적극적으로 추천을 안 하니 그것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나 제 생애에 치명적인 결과를 내는 결정적 순간에는 그저 안이하게 무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아닌 게 아니라 ‘시시한’ 의사밖에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남이 하지 마라 하면 제 의견을 내세워 관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뒤로 물러납니다. 아내가 저 식당 가자고 하면 마음에 안 들어도 갑니다. 저녁밥이 맛이 없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먹습니다. 말하자면 주관이 없고 의지가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머리에 든 것은 있어 책을 보고는 아는 것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산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편안한 삶이 될 것 같았습니다. ‘작자 미상의 기도문’(찰스 스윈돌)을 벽에다가 써 붙였습니다. ‘주님,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주께서 주시는 것은 받고/주께서 거두시는 것은 없이 살고/주께서 취하시는 것은 놓고/주께서 주시는 고통은 견디겠으며/주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고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교회 열심히 나가겠으니 제발 이번만은 살려주십시오.” 낯짝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16장에 나오는 ‘허정(虛靜)이란 말에 홀딱 빠져 거금을 들여 토민(土民) 전진원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致虛極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을 행초서로 써서 액자로 만들어 서재에 걸어놓고는 잘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내 머릿속에 아는 것만이라도 실제로 진지하게 행동을 하면 하다 못해 성철 스님의 발끝의 제자 흉내라도 낼 것 같은데 머릿속은 머릿속이고 갈등을 피하는 좁쌀 영감의 버릇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아닐지라도 좁쌀 영감의 변명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우선 저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저 웬만한 대학도 나오고 하니 그런대로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지능지수에, 유약한 의지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란 걸 이제야 알은 셈입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장자의 ’안시처순(安時處順)*이라고나 할까요. 때를 편안히 여기고 정말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죄악이 아니면 시비 걸지 말고 상대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게 저의 처세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별 볼 일 없는 글쓰기는 오십 년 넘게 매달여 왔으니 좁쌀 만한 면이 서니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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