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목 Jul 09. 2024

김종삼과 장자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장유의 율하카페거리에 있는 ’숲으로 된 성벽’(기형도의 시 제목)이란 이름의 책방에서 전호근 선생님이 자신의 책 『장자 강의』를 가지고 북토크를 한다고 해서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칠  년 전에 장자의 책을 몇 권 읽은 것이 있어 복습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장자의 해체적 사유』라는 책을 읽고 요약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요약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시인 김종삼에 대해 언급한 메모가 있었습니다.


  ‘시인 김종삼의 시를 자세히 읽으면서 느끼는 것인데 그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김종삼이야말로 ‘장자’적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철저하게 무소유적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다. 평생에 고전음악 듣고 시 쓰고 술 마셨다고 한다. 책 읽고 시 쓰고 술 마셨다는 이백(李白)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무용(無用)의 덕을 그는 가졌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현실 세계에서 그는 무능력자였다. 그 말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그 가족, 즉 아내와 자식들이 당했을 고통은 거의 상상을 안 해도 머리 속에 훤하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그의 무책임은 비난을 받아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평론가들의 말처럼 그의 삶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오직 소유적 마음을 버리고 그가 의식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허정(虛靜)의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술을 마셨다고 본다. 그는 장자의 말처럼 자아를 해체하고 오직 이 세상의 물(物)과 연속하여 물화(物化)하다가 자신의 생을 마친 것이다.‘


  제가 처음 김종삼을 만난 것은 아마도 대학교 예과 2학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는 시라는 걸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진술이 뭔지, 메타포가 뭔지도 몰랐고 그저 어떤 시 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자연히 시를 쓰는데 어려웠습니다. 그때 만난 것이 김종삼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시적‘이라고 느꼈지만 아무튼 어려운 말이 없이 진술로만 되어 있어 우선 접근하기가 쉬웠습니다.


  김종삼 시 중에서 제일 처음 만난 시는 「장편(掌篇) 2」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 一O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어린 소녀는 어버이 생일이라고/一O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이 시는 전부 진술로 되어 있습니다. 읽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른바 시의 난해성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거지 소녀의 슬픔이 가슴으로 아프게 전해집니다. 하지만 글 중에는 아무런 슬픔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이 글 밖에 있다는 정재사외(情在辭外)를 대변한다고 봅니다.


  김종삼의 시는 단순하게 언어를 구사해도 무언가 긴장되는 시적 분위기가 행간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느낍니다. 모르긴 해도 이것이야말 이 시인의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북 치는 소년」이 그렇습니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희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


  어려운 말이 전혀 없습니다. ’~처럼’이라는 직유만 세 개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각 행간은  읽는 이의 서정으로 깊숙하게 들어옵니다. 사실 이건 오랜 내공이 없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운 메타포를 사용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순도 높은 시를 그는 평생 216편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김종삼의 인생은 세속적으로 보면 기구(崎嶇)합니다.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나 평양에서 성장하다가 해방 전에는 일본에 유학도 하였습니다. 유학 자체도 순탄치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학도 자퇴하였습니다. 남한에 살면서 동아방송에 평생 재직하면서 음악 관계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고전음악을 들었습니다. 일간 스포츠에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나는 모짜르츠와 바흐를, 그리고 드뷔시와 구스타프 말러의 곡을 좋아해요. 음악이 없으면 그나마 글 한 줄도 못 썼을 겁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는 하는 곡은 하루 종일 혹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소주 중독자였습니다. 심지어는 인생 말기에는 소주를 훔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은 김종삼 시인이 집 나가서 연락이 없어 찾아다녔습니다. 술에 만취되어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그를 누군가 시립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십여 일 간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결국은 나중에 간경화로 1984년 63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그는 평생 단칸방 월세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옥인동이나 정릉의 산동네와 같은 도심 변두리를 전전했으며 월세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생활인으로서는 무능력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으로 보면 무능력자였으나 그 무(無)의 자리에 시와 음악과 술로 자리를 채웠습니다.


  장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蒙)출신으로 기원전 369년에 태어나 기원전 286년에 사망했습니다. 공자, 맹자는 제후들이 알아 주고 대우도 해줬습니다만 장자는 이름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맹자와 장자는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희한하게도 서로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습니다.

   장자의 사상을 천학비재(淺學菲才)한 제가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인 줄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자는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이고 인간은 그 중에 작은 그물코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천지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합니다. 이를 물화(物化)라고 합니다. 따라서 천지만물에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물질이 모였다가 기한이 다 차면 본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이고 물아양망(物我兩忘)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의 물화를 허심(虛心)이라는 마음으로 거울처럼 비춰지는 것뿐입니다. 비춰지고 사라집니다. 이런 허무한 세상에 추구할 것이 부귀공명도 아니요 자신을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산책하면서 노니는 즐거운 마음(逍遙遊)으로 지내다가 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래도 온갖 재난이 닥쳐오고 몸은 병마에 걸려 고통으로 시달립니다. 이것도 장자는 자연이 나에게 만들어준 우연이 인과되어 필연으로 나온 결과이니 모두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마땅한 길을 갈 뿐입니다(各得其宜).


  이런 장자의 사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아도 없고(無己), 공적에 연연해 않고(無功), 자신의 이름에 얽매이지(無名)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장자가 그토록 주장한 소요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요유의 핵심은 정신의 절대자유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김종삼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自身)이 없습니다. 시인으로서 어떤 공적에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전음악 듣고, 시 쓰고 술 마시다가 갔습니다. 거기에 세속 사람들이 선망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내용 없는 아름다움‘만이 희미하게 멀리서 들리는 목관악기처럼 울리고 지나갑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장어반(自藏於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