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너는 얼굴 마담이야 네가 소리의 진정한 모
습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 네게 남은 건 너
를 숨기는 겸손뿐이야 비올라, 너는 바이올린과 첼로 사
이에 끼어 누군지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
렇게 염려할 건 없어 시시한 게 인생의 주류니까 첼로,
네가 긁는 저음은 나의 내장을 썰고 지나가 버린다 콘트
라베이스는 구름이야 멀리 있을수록 더 네가 잘 보인다고
바순, 너는 연주 내내 끼득이다가 볼 일을 다 볼 걸 플롯
의 애매모호한 소리는 네가 알려주려는 메타포라고 생각
해 피콜로, 앙징맞은 너의 고음은 어린아이 재롱 같애 트
럼펫은 언제나 나이가 스무살이다 너의 앞에는 맑고 밝은
하늘이 메아리치며 달려가는 그 청춘의 힘에 나도 용기를
얻는단다 트롬본을 보면 대머리가 생각난다 중년의 익살을
보는 것 같다 호른 소리의 진폭 속에는 언제나 안개가 꽉
차 있다 그 속을 한없이 헤메고 싶어 클라리넷은 바른 말
하는 철학 교수 같다니까 북소리는 언제나 앉은 자리를 뭉
개고 있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등을 밀어준다 오케스
트라의 종말은 뭘까 정적(靜寂)이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봉이 멈춘 순간이 바로 그거라니까 어쩌면 우리의 죽음
의 순간이 바로 그걸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