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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Sep 10. 2024

지명도(知名度)와 은거(隱居)

  2023년 1월에 『의사 할배가 들려주는 조금 다른 글쓰기』를 출간했습니다. 출간을 하려면 자비로 해야 했으나 친구 L원장의 동생이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 그 분이 제 원고를 보고 출판해 볼 만하다고 자사에서 기획 출판하였습니다. 제 돈이 한 푼도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심적 부담도 갖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책이 안 팔리면 폐를 끼치게 되지 않을까 마음에 항상 걸렸습니다.


  제 책 제목이 ‘의사 할배…’ 운운하여 조금 잘난 체 하는 것 같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원래 제목은 ‘몽상하는 촛불’이었는데 출판사에서 판매를 위해 제목을 바꿨습니다. 제 책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메타포 문장을 만드냐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빌 루어바흐 식으로 단어 두 개를 가지고 A=B 식으로 메타포를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종합명제를 원용하여 주어만 주고 나머지 술어 부분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책에 실린 것은 7년간 손주들과 글쓰기 한 것의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책 내용을 다시 검토하여 보면 제 글쓰기 인생의, 길게는 50여 년, 짧게는 20여 년의 세월이 다 녹아 들어 있습니다. 그만큼 제게는 귀중한 자산이고 외람되지만 자부심도 없지 않습니다. 무명 작가이지만 저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계기가 되어 남들에게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김해 장유의 카페거리를 자주 산책하다 보니 동네책방 ‘숲으로 된 성벽’(기형도의 시 제목)이라는 간판의 서점이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조그만 서점인데 나름 예쁘게 꾸며 놓았고 책 읽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었습니다. 독서 모임이 있는데 인원이 차서 가입이 안 된다고 하는데 북토크 모임이 있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북토크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그게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몇 번 참석해 봤습니다.


  참석하고 보니 생각보다는 신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제 책을 가지고 한다면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고, 님 보는 김에 뽕도 딴다고 책도 팔릴 것이고, 어쩌면 재수가 좋아 많이 알려져 베스트셀러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만용(蠻勇)이 들었는지 사리판단도 세심히 하지 않고 우선 책 내용을 설명하는 ppt 슬라이드를 만들고 나서 서점 주인에게 북토크 제안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처럼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나서 시도하면 좋은 점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해보려고 인터넷을 찾아서 헤매다가 포기하고 유료로 ppt를 완성했습니다.


  입시 시험생이라도 된 듯이 두 곳의 서점 주인에게 북토크를 제안했습니다. 한군데는 USB를 보고는 내용은 신선한데 청중 대상은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학생을 둔 어머니나 초등학교 선생님이 좋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습니다. 서점 주인은 기회가 되면 연락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군데 서점 주인은 USB 볼 생각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명도가 없기 때문에 청중이 안 모인다는 것입니다. 심적으로 실망을 했습니다. 옆에서 처음부터 만류하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모든 것에 은퇴하세요. 당신처럼 늙은이가 말하는 걸 젊은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듣겠어요.”


  옛날에 사다 놓은 책 『숨어사는 즐거움』이 생각났습니다. 『한정록(閑情錄)』은 1610년에 허균이 중국의 서적 중에 자신의 주제에 맞는 글들을 모아 편집한 책입니다. 『한정록』의 중심주제는 은거(隱居), 즉 숨어서 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김원우 작가가 허균의 『한정록』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숨어사는 즐거움’이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저는 시골에서 삽니다. 한적한 곳에서 지내면서 스스로 위안을 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서울에서 출세한 친구들 생각도 납니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지 하는 쓸쓸함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지나가는 찬바람처럼 서늘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합리화 혹은 위로하기 위해 김원우 작가의 ‘숨어사는 즐거움’을 떠올립니다. “그래 나는 시골에 숨어서 나 혼자 즐기면서 살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번에 ppt 슬라이드를 만들면서 저의 가느다란 바람막이였던 ‘숨어사는 즐거움’이 박살이 난 셈입니다. 신춘문예에 합격한 것도 아니고, 대학의 유명한 교수도 아니고,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 주제에 지명도도 없이 천지도 모르고 나불대다가 큰코를 다쳤습니다. 주제 파악을 못한 것입니다.

  김해에 와서 목요일이며 오후 반차라서 거의 1년 반 동안 온갖 둘레길을 다 찾아다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기회만 되면 함안군, 의령군, 산청군, 함양군 등의 둘레길을 유튜브에서 검색하여 보고 찾아가 걸어봅니다. 주제넘은 생각이지만 이 산책은 어쩌면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요유에는 즐거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장자의 세계관은 인간은 우주라는 그물망의 그물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본래의 그물망으로 돌아갑니다. 


  소요(逍遙)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遊)는 놀다, 즐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는 동안 놀 듯이 즐기면서 슬슬 돌아다니라는 말입니다. 넓게는 산책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난관이 있습니다. 인생사 그다지 우환이 없으면 그것도 마음 먹기 따라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 인생고를 만났을 때 과연 장자의 ‘소요유’ 지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습니다. 장자는 소요유의 경지에 가려면 허정(虛靜) 심재(心齋) 좌망(坐忘)의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누워서 감 떨어지듯이 소요유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시간만 나면 여기저기 산책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ppt 프리젠테이션 못한다는 것이, 지명도가 낮다는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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