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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Oct 20. 2024

송주성

시                              

                                       송주성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들은

시가 아니라 실은 케케묵은 버릇들이 아닐까

돌려 말하고 빗대어 말하는 것

흐릿할수록 넉넉해 보이던 서글픔의 추억이 아닐까

당신의 얼굴을 향해 조금씩 말하는 것

눈물 앞에서 꼼짝 못했던 팔 저린 기억이 아닐까

말을 끊고 넘기고 잇고 또 말을 남기는 것

누구를 생각하며 아픔을 먼저 연습해두던

혼자 오르던 오후의 다락방 같은 것

내 오래고 텁텁한 위안의 기술이 아닐까

모음에 맞추고 자음에 흘리고 박자를 치며

바람 몹시 부는 날 부는 바람 속으로

못다 부른 노래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

밤하늘도 별도 바람도 어머니도 누나도 형도

아버지도 당신도 그들도 모두 우리면 좋겠어서

완성되지도 못할 편지를 쓰다 말다 하던

고백하지도 않을 말을 뒤척이며 연습하던

외진 날들의 버릇이 아닐까     


-----------------------------------------------------------------------------    

 

1 Analysis by  m&s     

----ⓜ(metaphor)  ----ⓢ(statement)   ----ⓢ’(simile)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들은 시가 아니라 실은 케케묵은 버릇들이 아닐까----ⓢ

∙돌려 말하고 빗대어 말하는 것----ⓢ

∙흐릿할수록 넉넉해 보이던 서글픔의 추억이 아닐까----ⓢ

∙당신의 얼굴을 향해 조금씩 말하는 것----ⓢ

∙눈물 앞에서 꼼짝 못했던 팔 저린 기억이 아닐까----ⓢ

∙말을 끊고 넘기고 잇고 또 말을 남기는 것----ⓢ

∙누구를 생각하며 아픔을 먼저 연습해두던 혼자 오르던 오후의 다락방 같은 것----ⓢ

∙내 오래고 텁텁한 위안의 기술이 아닐까----ⓢ

∙모음에 맞추고 자음에 흘리고 박자를 치며 바람 몹시 부는 날 부는 바람 속으로 못다 부른 노래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

∙밤하늘도 별도 바람도 어머니도 누나도 형도 아버지도 당신도 그들도 모두 우리면 좋겠어 ----ⓢ

∙완성되지도 못할 편지를 쓰다 말다 하던 고백하지도 않을 말을 뒤척이며 연습하던 외진 날들의 버릇이 아닐까----ⓢ     

----ⓜ(0)  ----ⓢ(12)   ----ⓢ’(0)     


2 Comment

  이 시는 거의 전부가 진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란 무엇일까?라는 명제는 설명하자면 한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명한 문인들이 이미 다 천착(穿鑿)한 문제를 실력도 없는 제가 왈가왈부(曰可曰否)할 계제(階梯)는 아닙니다. 다만 유명한 문인들은 어떤 언급을 했는지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을 소개합니다.(정효구 교수가 쓴 글을 누군가 인용한 것 같은데 확실치 않습니다)


  김규동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쩔 도리 없을 때 시라는 물건을 그적거려본다.”

  김종길 “즉각적 깨달음”

  허만하 “자존의 절벽”

  파블로 네루다 “시는 내 삶의 단독 정부”

  문정희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건강과 같다”

  신달자 “내 뼈 안에 울리는 외재율”

  오탁번 “저녁 연기 같은 것.”

  문인수 “삶의 궁기를 베껴 적은 것.”


  송주성 시인에게 시란 “케케묵은 버릇이다, 서글픈 추억이다, 팔 저린 기억이다, 위안의 기술이다, 못다 부른 노래 돌려주기이다, 외진 날들의 버릇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특별한 것, 고급스러운 언급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말입니다. 시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쨌든 뭔가 어렵고 고상한 것으로 치부(置簿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송주성 시인은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이라고 시를 얕잡아 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 진심은 아닐 것입니다. 송주성 시인은 시란 그렇게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어쩌면 반어법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류 시인으로 조잡한 시를 쓰는 저이지만 저도 때로는 ”내가 왜 시를 쓰고 있지?“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하고 자문하는 때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비록 유치하겠지만―우선은 어떤 사물, 상황을 보고 제 마음에 어떤 감흥이 일어나면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때로는 제가 살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그것을 시로 쓰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어떤 이미지의 쾌감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심미판단과 숭고판단을 갖고 제가 이렇쿵저렇쿵 할 정도의 실력은 안 됩니다. 한 감성과이성이 연결되어 미적 쾌감을 줄 때, 혹은 한 연(聯)이, 아니면 시 전체가 어떤 메타포를 이루어 주는 미적 쾌감을 저는 시를 읽는 재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주성 시인의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를 반성케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근래에 제가 어떤 것에서 읽은 T.S. 엘리엇의 말이 있습니다. ”시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엘리엇은 ‘정서를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도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특정한 정서의 형식이 되는 한 묶음의 사물, 하나의 정황,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저도 초보자이지만 시를 쓰면 감정에 파묻혀 헤어나오질 못하고 그걸 그대로 직설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를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시대에 살면서 시를 쓴다는 것에 때로는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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