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계곡물은 말을 한다. 그 말에는 새소리가 있고 나뭇잎 소리, 풀잎 소리가 있다. 바람이 그 위를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아니 그것은 대원사 스님의 염불소리이다. 대원사의 원(源)은 근본 원자이다. 마음의 근원을 찾자고 대원사가 참선을 하고 있다. 나를 보자는 염원이 염불이 된 것이다.
수평으로 평안을 안고 흐르는 계곡 물 속은 대원사도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소리도 안고 있다. 하지만 계곡 속으로 내려가면 허공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 이것이다. 계곡의 넓이와 깊이가 계곡물이 참선한 수련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군데군데 거친 바위들이 잠시 깨달음을 얻은 흔적으로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살아가는 것은 느리고 빠름의 리듬을 타야 한다. 용소(龍沼)에 이르니 용이 승천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건 윤회를 벗어나 극락세계로 가고 싶은 희망이 그런 일화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고단한 인생살이 걸으면서 우리의 이상(理想)을 투사(projection)하다가 한 세월 다 가기도 한다.
깨달음의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돌나물의 노란색, 골무꽃의 보라색은 눈물이 번져서 된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 삶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어날 평안의 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숨어버린다. 그건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하던 샤갈의 고독이다. 먹고 살아야 하고, 자식 농사 지어야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본능이 주는 고독, 인간과 부대끼면서 잘난 맛에 살아야 하는 비애, 비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서로의 관계, 허공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성취해야 하는 고독, 샤갈의 고독은 제 인생을 몽상하면서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버렸다. 계곡의 물도 몽상을 하여야 한다.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靈長)인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준 식욕과 색욕을 평생 따라다니다가 한 세월 다 가고 만다. 인간이 잘났다고 뽐내는 건 문화와 문명뿐이다. 그것이 그렇게 뛰어난 것이어서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인가. 죽고 나면 개별적 생명체는 모두 동일하다. 저 바위나 개구리나 풀이나 소나무나 휘파람새나 생명은 다 같은 것이다. 그것도 50억년이 지나면 없어진다고 이미 예약되어 있다.
계곡 속에 노병사(老病死) 묻고 다 받아들이고 물 흐르는 대로 흘러야 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말을 걸어오면 계곡의 발걸음도 고적(孤寂)하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물이다. 그것들은 인연 따라 생겨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그저 흐를 뿐이고 어디서 멈출지도 모른다. 멈추면 나는 없다. 있는 것은 공적(空寂)뿐이다. 송광사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계시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 육신과 정신은 둘이 아니다. 하나 같이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인연이 다한 것뿐이다.
대원사 계곡은 직선이 아니다. 해탈은 잠잠하다. 거기엔 요동이 없다. 부처님이 염화시중(拈花示衆)하면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지은 미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떨어지면 몸은 가벼워지고 하늘로 올라간다. 태산 같은 세상에 부딪치자 사대(四大)는 하얀 거품을 내뿜고 튀어올랐다. 그건 잠깐의 깨달음에 대한 환희의 몸짓이다.
때로는 대원사 계곡은 번뇌와 고통으로 몸을 비틀어 굽이친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자고 아무도 모르게 계곡이 넘쳐나도록 몸부림치고 비틀고 소리지르며 대성통곡한 때도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알아들어도 몸이 세속으로 흘러들어 쾌락에 히히덕거리면서 살던 때도 있었다. 이제야 계곡은 ‘아다지오’로 흘러야 한다. 후회도 회한도 고통도 번뇌도 느리게 하면서 내려놓아야 한다. 부처님의 해탈은 못 가도 때로는 영혼이 하얗게 솟아올라 기뻐야 해야 한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되고 즐겁고 자신의 본질을 지키고 정화시키자고 물소리를 낸다. 그것이 공허하더라도 계곡은 염불하면서 흐를 것이다.
대원사의 일주문(一柱門)의 방장산(方丈山)이 계곡을 지켜준다. 계곡의 걸음은 고독한 것이다. 나를 찾아서 걸으니까. 마음의 근원을 보려고 계곡은 바흐의 시냇물이 된다. 거기에 상락아정이 있다는 것을 믿는 신심(信心)이 소중하다. 대원사 대웅전의 부처님이 계곡 물소리를 듣고 미소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