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쓸 수 있을까』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by 현목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는 인터넷을 검색해 보아도 딱히 태어난 연도가 안 나옵니다. 이리저리 계산을 대어 보니 거의 1938년도 생 같습니다. 그런 그가 77세가 되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몇 시간이 지나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재능은 없지만 글쓰기를 좋아하고 관심이 있어서 여러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어디선가 소개하는 글이 있어 찾아서 목차를 보니 그다지 마음에 끌리는 것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살까말까 하다가 그래도 그와 나의 나이가 같은 연대이니 그는 어떻게 생각하나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자마자 손에서 놓치 못하고 다 읽어버렸습니다. 물론 193페이지의 책이니까 그렇게 된 면도 있으리라 봅니다만 아무튼 흥미가 있었습니다.


칼리파티데스는 그리스 사람으로 아마도 가난으로 말미암아 20대에 스웨덴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는 스웨덴에서 작가로 성공하여 평생 40여권이나 되는 책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리스어가 아니라 스웨덴어로 썼습니다.


그런 그가 막상 77세가 되지 글을 쓰지 못했다니 그것이 너무나 많은 저작을 해서 글감이 고갈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뇌쇠하여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인지 스톡홀롬의 작업실에서 여러 곳으로 여행하면서 전전하다가 마침내 고국인 그리스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고향 사람도 만나고 아버지 어머니와의 추억 그리고 친척들과의 해후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조금씩 변하여 갔습니다. 하지만 책의 말미에 자신이 글을 쓸 수 있게 시동을 걸은 힘이 스웨덴어에서 모국어 그리스어로 바꾼 것이 그 원인이라고 뜬금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알고 싶던 것이 조금은 어리둥절해져 버렸습니다. 용두사미격이 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에서 저 나름으로 흥미 있는 점을 몇 가지 발견했습니다. 우선 책 표지의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서의 그림입니다. 원저는 『ANOTHER LIFE』이고 표지 그림도 다릅니다만 연필화로 윤곽만 잡은 인물화가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순간 저도 저의 얼굴을 저런 식으로 그려서 저의 영정화를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아내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얼굴 같은 그림으로 저의 영정화로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가지의 글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67페이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만이 자살한다고들 한다. 예외가 하나 있다. 전갈이다.” 저는 「전갈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왜 전갈은 번지는 들불에 속수무책으로 죽느니 목숨을 끊자고 생각했을까요. 아니 전갈이 그렇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전갈의 유전자 속에서 들불의 신호를 보는 순간 째깍째깍 유전자가 작동하여 독침을 자신에게 쏘는 것입니다. 그냥 타 죽는 것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차이는 무얼까요. 유전적으로 후자가 존엄하다고 여긴 것일까요. 진화가 전갈의 유전자 속에 심어놓은 기전일까요. 만일 그것이 더 가치 있다고 진화가 말했다면 인간의 자살과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소설 「설국」을 지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과 전갈의 자살과는 연관이 있는 걸까요. 인류 역사상 이름 없는 자살도 많지만 인류가 존경하는 인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는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전갈의 자살의 한 변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6페이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오늘밤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너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에’라고 외친 다음 눈을 감아라. 네가 오늘밤 죽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고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합니다. “세월 빠르네. 벌써 일년이 지나가니.” 이런 말이 젊었을 때는 세월이 빨리 지나가니 나이도 먹고 이제는 어른 노릇도 하고 신난다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으음, 이제 또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는다는 말이네 하고 신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은 마치 입학시험이 언젠가 오리라 하고 준비하다가 보면 마침내 시험 치러 가는 아침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죽음의 밤에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최후를 맞이할지 생각하면 만감이 오갑니다.


“일흔다섯 살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앞에 두고 있었다. ‘나의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제는 이런 대답이 머릿속에 자주 맴돌았다. ‘돌아가라’.”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말입니다.

사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 생각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은 십년 남짓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정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한 세상을 마감할 수 있나 하고 자신을 반성해 보지만 위인이 변변치 못하니 하루하루가 충만한 날이 되지 못합니다.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카르페 디엠(carpe diem/seize the day)의 하루하루가 되어야 하겠는데 허구헌날 후회를 하니 감당이 안 됩니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할 팔자인가 봅니다.


“작가로서 팔짱을 끼고 달걀이 삶아지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리지 마라. 끊임없이 읽고 써야 한다.”


말이 쉽지 끊임없이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서재에 허영으로 사들여 놓은 책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걸 다 읽는 걸 목표로 해도 끝이 없습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서가 77세에 은퇴하리라고 생각한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두려운 것은 조롱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형편없는 글을 써서 스톡홀름 스트룀멘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조차 키득거리면 어떡하나. 나는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후지게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실은 글쓰기의 최대의 적입니다. 저도 언제나 글을 끊임없이 써야 한다, 나는 ‘문장 노동자’다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지만 언제나 마음만 있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게 ‘후지게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을 쓰면 멈추지 말고 쓰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어, 생각이 안 난다’라는 말까지 넣으면서까지 멈추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려고 심지어 일년 넘게 훈련을 해봤지만 녹녹치가 않습니다.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서는 그의 아내인 구닐라에게 말합니다. “달콤한 삶이 그냥 생기겠어. 그러려면 뭔가 있어야지. 내가 바라는 것은 품위라고. 그게 없으면 꿀에서도 쓴맛이 난다니까.”


공공장소에서 무료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개 팔십이 넘는 노인이 식기를 들고 앞에 끼어듭니다. 자기도 미안한지 눈길을 피합니다. 뒤에 가서 제 자리에 서면 사람들이 앞으로 가라고 할지도 모르고 기다려봤자 십분 정도일 텐데 빨리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욕심 앞에 자신의 존엄을 지킬 명분이 없는 겁니다. 혹시 이분은 품위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를 당해도 원초적인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언어를 구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무언가 품위를 느낍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점은 서양보다는 동양이 취약한 것인 아닌가 하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책자이지만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언어구사에 품위를 느낄 수 있고 언중유골의 유머도 발견할 수 있고 노년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도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