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없지만 있다
봄비는 있지만 없다. 공기 중에 없지만 있다. 만지면 도망가서 빈손이 된다. 어딘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문드러져서 귓가에 겨우 들린다. 정신이 손 뻗어 잡으려 하니 저만치 돌아가버린다. 이미 쓸쓸하다고 생각한 곁에서 따뜻한 체온이 다가온다. 겨울이 이제는 부드러워져 있다. 온 천지를 팔 벌려 살포시 안고 있다. 무게가 지나가는 건 허공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는 자체가 겨우내 메마르고 갈라진 마음에 위로가 된다.
마른 밭이 봄비가 도착하는 희망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봄비는 없어진다. 다시 내리는 한결 같음에 밭은 이미 자신의 강고함을 포기하였다. 귓속을 지나면서 소리 없이 말하는 봄비를 듣는다. 봄비가 내릴 때 어느 곳이라고 지정한 것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을 가슴에 안고 같이 가는 게 봄비의 일이다. 아픈 것은 봄비가 손도 없이 한 아름 쓸어 담고 나간다. 봄비가 가는 곳은 자신도 모른다. 봄비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내리는 것뿐이다. 지친 자에게 도착해야 한다.
봄비는 내려서 빗물을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에 퍼져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원체 자국이라고는 갖고 있지 않고 봄비의 자취는 대상에게 전가된다. 대상이 시간이란 변수에 의해 젖어 있다. 그걸 보고서야 그가 왔다가 간 것을 알 수 있다. 봄비에게는 앞만 있고 뒤가 없다. 도무지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내려서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껏 그가 간 곳을 아는 자는 없다. 아마도 간 것이 아니라 대상의 몸에 육화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봄비에게 지난 과거를 묻지 마라. 어떻게 그렇게 침묵 가운데 내리는지는 자신도 아마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입은 있어 할 말은 많지만 봄비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리는 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밤새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가는 곳은 자고 있는 사람들 곁이다. 자고 난 사람들은 몸이 젖어 있음을 눈으로 보고 봄비가 다녀간 것을 그제야 안다.
이미 나의 기억 속으로 봄비가 다녀갔다. 기억의 땅이 푸시시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뉘였다. 시간이 다가오더니 어느새 벚꽃이 웃고 있었다. 창경원의 야(夜)사쿠라 밑에서 한잔 술을 따라 마셨다. 돗자리에는 물론 혼자였다. 사람들이 앞으로 위로 옆으로 지나갔다. 그 그림 위에 얹혀진 또 하나의 그림이었다. 꽃받침을 슬쩍 손가락으로 튀겨 보았다. 꽃이 산산이 흩어지며 바람이 불고 꽃비 사태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가뭄에 소나기를 얼굴에 대고 기뻐하듯이 아우성치며 꽃비를 맞고 있었다. 무료한 영화를 보듯이 일어나서 걸어갔다. 길이 한 줄기 바람처럼 휙 하고 앞으로 던져졌다.
그 길을 발로 밟아보았다. 그것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땅이 아니라 그것은 공중에 있는 길이었다. 그 속에다 발을 내디디니 발이 폭 빠졌다. 다른 쪽 발을 집어넣어 보았다. 그 발은 빠지지 않고 섰다. 빠진 발을 끌어올려 길 위에 놓았다. 길은 마치 마법사의 비짜루처럼 휙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길을 타고 걸었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 소리는 없었다. 몸은 축축히 젖어왔다. 빗속을 그 길 따라서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주위는 소리 없는 적막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밤새도록 풍경의 소실점까지 걸었다. 푸석푸석하던 육신의 흙이 따뜻해졌다. 봄비는 이미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