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많은 고3 학생이 서울을 꿈꾸었다. 사정은 다 달라도, 결론은 섬을 벗어나자는 한 가지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상경(上京). 그것만이 청춘의 올바른 시작일 것만 같았다. 수능 날이 다가오면서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준을 점점 낮추었으나, 그래도 서울 안의 학교를 희망했다.
부모님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셨다. 엄마는 서울대 갈 거 아니면 가까운 국립대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서울대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아니면 아들의 성적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어쩌면 아들이 멀리 떠나는 게 아쉬웠을 수도 있겠다.
삶은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시험은 만만하지 않았고 점수가 안 좋았다. 서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눈을 낮췄다. 세 번의 원서 접수 기회 중 두 번을 서울에 썼다. 그리고 보기 좋게 다 떨어졌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온갖 표와 학교 분석 정보를 보면서 이 정도면 합격할 만하다 해서 골랐는데 낙방이라니.
재수는 절대로 안 할 작정이어서 지역 국립대학의 비인기 학과에 지원해 두었는데 그것만 붙었다. 여기라도 다니면서 편입해야 하나 고민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곧 좋은 소식이 들렸다. 장학생이 된 것이었다. 게다가 과별로 장학생을 모아 미국 아이비리그로 일주일간 무료 연수를 보내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작은이모는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야, 가문의 영광이다. 우리 집안에서 미국을 다 가네.”
이모의 칭찬은 날 기쁘게 했다. 서울 못 가면 어때, 미국 가는데. 1학년 끝나고 겨울 방학에 갈 예정이라 해서 1년 동안 기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하기로 했다. 낯선 수강 신청도 하고, 학식이란 것도 먹어보았다. 동아리에 가입하고 봉사활동도 했다. 공대생답게 체크 난방을 여러 벌 준비해서 번갈아 가며 입었다.
몇 주쯤 지났을까. 학교에서 온 전화에 나는 착잡해졌다. 작년에 유학 다녀온 장학생들의 설문조사 결과, 만족도가 낮았다고 해서 연수 장소가 바뀐 것이다.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이게 웬 날벼락인지. 대신 1주에서 6주로, 기간은 더 늘어날 계획이라 했다. 미국에 잠깐 보내주는 것은 시야를 넓히라는 이유지만, 필리핀 한 달 반 보내주는 건 진짜로 영어 공부하라는 학교의 의도였다.
스무 살 청년은 놀고 싶은 마음이라 미국에 가고 싶었다. 그동안 미국 간다고 신나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는데. 엄마 역시 아쉬운 눈치였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
“어쩔 수 없지. 필리핀도 좋아. 네가 열심히 하고 오면 되는 거야.”
이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태도에서 잘 보고 배웠다고. 자라면서 엄마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는데 어느새 내 마음가짐은 엄마를 닮아 있었다. 엄마의 조언처럼 상황보다 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인생은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으니 삶을 대할 때 조금 더 부드러운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학교나 지역에 대한 불만도 오래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로 했다.
좋은 마음으로 보니 학교가 만족스러웠다. 봄에는 벚꽃길이 길게 이어졌고 여름에는 유치원생들이 교내의 넓은 잔디밭으로 소풍을 왔다. 겨울에는 눈 쌓인 벌판에서 아이들이 썰매 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노루가 풀 뜯어 먹으러 산에서 내려오는 학교가 전국에 얼마나 있을까.
1학년 마치고 필리핀에 다녀왔고,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2학년이 되어 전공 수업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공부에 흥미를 느꼈다. 편입 생각은 싹 사라졌다.
2학년 때 동아리에서 총무를 맡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새벽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열정이 넘치는 날에는 엄마 출근하고 나서 들어가기도 했다. 몰래 귀가하는 것도 처음이 어렵지, 나중에는 쉬웠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냐는 엄마의 물음에는 늘 엄마가 잠드는 시간 언저리를 불렀다.
“11시?”
“11시 같은 소리 하네! 엄마가 어제 11시 반에 잤는데.”
“아, 맞다. 12시에 들어왔다.”
“으이구.”
나는 헤헤 웃으며 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새벽 4시 넘어서 귀가한 건 지금도 비밀이다.
오랜만에 외식한 날이었다. 집 근처 식당으로 숯불갈비를 먹으러 갔다. 좌식 테이블에 엄마와 동생이 나란히 앉았다. 고기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고3이었던 동생은 배시시 웃으며 엄마 팔에 쓱 기댔다.
“엄마, 나 술 마셔봐도 돼?”
“술?”
우리 집에는 술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퇴근 후 맥주 한잔 마신다거나 소주잔을 부딪치는 모습을 우리 남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약간 놀라면서도 그 상황을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맥주, 소주?”
“음, 소주!”
나는 괜히 한마디 했다.
“으이구.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동생과 아웅다웅하는 내게 엄마가 슥 물었다.
“너는 소주 마실 수 있어?”
당황스러웠다. 현관문을 몰래 열고 들어왔던 수많은 새벽에, 엄마는 내가 뭘 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마실 수는 있지.”
“소주 마셔? 언제 마셔봤어?”
엄마 눈을 피해서 어물쩍 둘러댔다. 그냥 친구들이랑 마시지, 뭐.
어른이 되고 싶은 동생과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엄마. 사랑하는 우리 가족. ‘새옹지마’ 어원에서 변방의 노인이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이 유지하려던 것도 사랑하는 아들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다고 하던데 거센 마음의 파도도 고요하게 만드는 힘이다.
동생은 소주 한 잔 마시고 “으익, 써!” 했다. 엄마도 한 잔 마셨던가. 얼굴 빨개진다고 안 마셨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한 잔만 홀짝 마셨다. 한 번에 넘기는 모습에 엄마가 놀라면서 왜 이렇게 잘 마시냐고 물었다.
사실은 나도 부모님 닮아서 잘 못 마신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 때도 술 한 잔 마시면 물 한 잔 마셨다. 아니면 금세 얼굴이 발개졌다. 그런데 자주 마셨더니 조금 익숙해져서 주량이 몇 잔 정도 늘어났을 뿐이었다. 지금은 술을 안 마신 지 오래되어서 다시 엄마 체질로 돌아왔다.
우리 가족은 소주병에 소주를 남긴 채로 고깃집을 나왔다. 술은 부모에게 배워야 한다는데 안 배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술 말고도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