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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Oct 16. 2023

이별 박람회를 마주하는 자세

 지금 돌아보면 나는 조금 이상한 면이 있어서, 군대 가는 것이 두렵거나 무섭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한국사 과목 점수가 안 좋았던 이유도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사만 보면 눈물이 핑 돌아서 공부를 못 했기 때문이다(핑계 아님). 어서 군대에 들어가 내가 자란 국가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입대 후’와 ‘전역 후’에 많이 달라졌지만.


 “엄마, 나 군대 가요.”

 한 달 뒤에 입대한다는 갑작스러운 결정에 엄마는 깜짝 놀랐다. 사실 나도 놀랐다.

 당시 ‘방사능 시험병’이라는 병과가 있었는데 1년에 한 명 선발했다. 지원 자격이 ‘관련학과 2년 수료’였기 때문에 여기에 지원하려고 남들보다 군대를 1년 미루었다. 2학년이 되어 학교 다니는데 11월이 되자 공고가 떴다. 내년 1월 입대 예정자를 모집했다. 인터넷상에 지원자가 몇 명인지도 표시되었는데 지원자는 1명, 나뿐이었다.

 다만, 나는 아직 2학년 수료를 두 달 남긴 상태였다. 입대일은 1월이라 그때가 되면 자격이 되는데, 아직은 요건을 충족한 게 아니라서 병무청 홈페이지에 질의했다. 답변이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제주도 병무청’에도 전화했다. 이러이러한 사정인데 입대 가능한지 묻자, 아직 수료 전이라 지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나는 부랴부랴 다른 입대 방법을 찾았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당시 최대한 빠르게 지원할 수 있는 부대에 지원했고 12월 입대 예정일을 받았다. 빨간 글씨로 이 지원은 취소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과 친구에게 알렸다. 나 자신도 마음을 다잡고 일상으로 돌아가 기말고사를 준비했다. 며칠 뒤에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병무청에서 답변이 와 있었다. ‘방사능 시험병’에 지원할 자격이 된다는 답변이었다. 화가 나서 제주도 병무청에 전화했더니 담당자라는 사람은, ‘아, 그래요?’ 할 뿐이었다. 나도 어쩔 줄 몰라,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이라니. 나에게는 ‘다음’이 없는데.

 그날 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나에게 온 것은 어떤 특별한 경험 혹은 귀인과의 만남을 위한 게 아닐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안정한 마음으로 학교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는 평소와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했다. 엄마도 평소와 같이 “조심히 갔다 와.”하고 출근했다. 우리는 항상성을 따랐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오늘 할 일을 해야 하는.


 ‘입대할 때는 역시 기차지!’ 하는 생각에, 서울에서 하루 자고 기차를 탔다. 논산 가는 길, 기차 안에는 모자(母子)가 여럿 있었다. 빡빡이 아들과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를 볼 때는 괜찮았는데 남의 집 가정을 보니 괜히 울컥했다.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갑자기 동승을 요구하며 다른 손님을 태웠다. 나와 또래인 입대자 같았다.

 “혹시 시계 필요하면 하나 가져가.”

 기사 아저씨의 친절에 나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입대하는 젊은이에게 세상은 따뜻하구나. 기사 아저씨는 한 마디 더했다.

 “2만 원만 줘.”

 나는 때마침 시계가 없어서 그 싸구려 시계를 2만 원에 샀다.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훈련소로 들어갔다. 공기가 차가웠다. 이별 박람회에 온 것처럼 세상 모든 헤어짐은 여기 다 모인 것 같았다. 울며 웃으며 안으며 보내며 손 흔드는 사람들. 누가 단상에서 연설했다. 우리는 연병장에서 행진했다.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인사하라며. 일동은 자기 가족을 찾아 ‘엄마! 아빠!’ 외치며 눈빛으로 껴안았다. 연인에게 달려가 안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이었지만 어떤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라고 나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

 나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허공에 대고 손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눈 맞추면서 인사했다. 쓸쓸하거나 외로운 느낌은 전혀 없고 조금의 긴장과 설렘이 나를 채웠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슬쩍 웃었다. 정말 그랬다.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집 나올 때 했던 말을 속삭였다.


 나는 정녕 긍정적이었을까. 어쩌면 다 자기합리화다. 병무청에 찾아가서 입대 취소하라고, 나는 다른 곳으로 갈 거라고 따져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냥 내 몸 편하게 행동한 것이다. ‘거기 지원했더라도 합격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1년 더 미루기는 싫었으니까’ 하면서. 회피형 인간이라 따지고 드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택시 기사가 동승을 요구하고 시계를 강매할 때도 아무 말 못 했다. 어리숙하고 답답한 태가 나는 게 어린 티를 못 벗어 그런 것도 같고, 내 천성이 (제주도 말로) ‘요망지지’ 못 해서 그런 것도 같고. 내 성격 못난 것까지 다 ‘운명’이라고 받아들여 버렸다. 그런 사람이라서 웃으며 입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역 후에는 이런 내 성격에 반감이 강하게 들었다.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해야지 강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게 말이 되냐는 생각에 세상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태도가 나랑 맞지 않았는지 삐그덕대는 삶을 살다가 지금은 그 중간 어디쯤 마음이 걸쳐 있는 듯하다. 뭐든 ‘적당히’가 어려운 거라고, 적당히 따질 줄 알고 적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지. 지금도 어렵다.


 입대 이틀 전, 즉 비행기 타기 전날, 동아리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았다. 엄마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왔는데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아빠를 만났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했다.

 “집에서 밥 안 먹어? 엄마가 너 군대 간다고 소고기 사놨다고 했는데.”

 아. 엄마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잠깐 내 발이 땅에 붙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발걸음 떼었을 때 나는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친구를 택했다. 밥을 먹는데 엄마가 계속 떠올랐다.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2년 뒤에 보자고 하며 자리를 나왔다. 집으로 뛰어갔다. 이미 밥은 다 먹었고 엄마는 방에 누워 있었다.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를 안았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와 같다면, 몸조심하고 어디서든 열심히 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강물은 흐르는 대로 두고, 나는 내 몫의 물만 양동이에 덜어내서 사과나무에 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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