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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Oct 16. 2023

'이것'까지 삼켜야 어른

 엄마는 음식을 가려 먹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나는 오이를 안 먹었다. 수박도 안 먹었다. 생선도 안 먹고 김치도 안 먹었다. 음식에 대한 호불호는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어린이에게 금기시되었다. 청소년 세계에서는 못 먹는 음식 있으면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특히 김치를 안 먹는다는 사실은 어딜 가든 논란을 일으켜서 복잡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먹는 척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안 먹는 반찬을 종종 내 수저 위에 올려놓았다.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은 거야.”

 미역국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고 했다. 멸치 먹으면 뼈가 튼튼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반찬들은 어디에 좋은지 다 알지 못해서 이것저것 골고루 먹어야 좋은 거라고 했다.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의학 프로그램을 즐겨 보시기 전부터 그랬다.

 나는 햄버거 좋아하고 피자, 치킨 좋아했다. 고기가 있어야 맛있다고 느꼈다. 햄버거와 피자는 엄마 아빠가 먹지 않는 음식이라서, 집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건 치킨뿐이었다. 그마저도 배달이 오지 않는 지역에 살아서 시내로 이사 가기 전까지 거의 먹지 못했다.

 동생은 면을 좋아했다. 시골 살 때는 30분을 걸어야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나와서 먹고 싶은 것을 사지 못했는데, 아파트에 살게 되자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다. 동생은 매일 라면을 사다 끓여 먹었고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라면 먹으면 뱃살이 나온다.’


 고등학생 되어도 엄마가 깨워주어서 겨우 기상했다. 대충 씻고 교복을 입었다. 식탁에는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밥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어떤 반찬이 있는지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식사’란 자동차 기름 넣는 것처럼 몸에 연료 공급해 주는 행위였다. 한창 먹을 때는 한 끼에 세 공기씩 먹어서 참 연비가 안 나오는 소년이었는데 그 시기를 막 넘기던 참이었다.

 “얘는 어떻게 밥 먹으면서 자.”

 밥보다 잠이 보약인 단계에 들어섰는지 아침밥 먹는 중에도 눈이 감겼다. 자도 자도 잠이 부족했다. 접시에 고개를 박을 뻔한 적도 몇 번. 엄마는 신기해하면서 안쓰러워했다. 그래도 나는 손에서 숟가락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입 안에 구겨 넣은 채 학교로 뛰어갔으니, 아침밥을 거르지 않겠다는 불굴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학교 공부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밤 11시였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하라고 해서 앉아있긴 했는데 공부가 잘 안되어서 쉽게 딴생각에 빠졌다. 어렸을 때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 속에서 고등학생 형, 누나들은 밤 12시까지 학교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귀신을 만나곤 했는데,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귀신을 만나지 못했을뿐더러 자정까지 공부하는 일도 없었다. 해야 할 시간까지 하고 땡 하면 바로 하교했다.

 다만 거르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기로 했으니 빠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바로 씻고 잤다. 일어나서 다시 학교 갔다. 그런 생활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부지런해서 그랬을까, 인생은 원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는 그런 것이었다. 쉬지 않고 달리다가 일 년에 두어 번 아들딸 손 잡고 박물관에 가거나 한라산에 오르는 그런 것이었다. 한참 걷다가 숨이 거칠어질 때 한 번씩 뒤를 돌면 작아진 건물, 멀어진 등산로를 바라보며 저기 있던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실감하는 그런 것이었다. 열심히 잘 살았다, 짧은 감상을 남기고 다시 위로 오르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것이었다.

 다만 부모님과 나의 차이는 지구력에 있었다. 부모님은 한결같이 성실했으나 나의 변덕은 질풍과 노도였다. 고3이 되어서는 야간자율학습 대신 독서실을 끊었다. 독서는 잘 안 했고, 친구들이 부르면 아파트 단지 농구장으로 달려 나가서 잘하지도 못하는 농구를 재밌다고 했다. 고등학교 3년 외에는 농구공을 만져본 적도 몇 번 없고 규칙도 잘 모르지만 달리는 게 좋아서 막 뛰어다녔다. 바람처럼 달리고 파도처럼 땀 흘렸다. 운동 후 다시 독서실로 돌아가면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자학했다. 공부 안 하고 놀았던 것에 대하여 고해성사하듯 일기 쓴 후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몇 주 지나면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골방 철학자가 되어 깊은 고민에 빠지는 나였다. 철학자에서 학생으로, 학생에서 다시 운동선수로 철새처럼 철 따라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찬 바람 부는 계절이 되었다.

 “긴장하지 말고 시험 보고 와.”

 수능 시험 날도 평범한 아침이었다. 정으로 잔뜩 버무린 엄마의 한마디가 반찬으로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엄마는 평소처럼 밥 차린 후 일 나갔고 나도 밥 먹고 시험 보러 갔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풀고 나왔다. 아쉽게도 시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모의고사보다 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시험장에 들어가던 순간의 가벼웠던 마음가짐과는 달리 후회는 무거웠다. 한편으로는 나의 삶 전반에 걸쳐 아쉬움을 과자 부스러기처럼 흘리고 다녔기에, 수능 시험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를 견지하는 모습이 새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강력한 아픔이었지만 ‘후회 전문가’로서 낯설지 않았달까. 몽롱한 밥알이 목구멍을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감각은 아릿한 기억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지금도 생선은 잘 먹지 않는다. 오이와 수박 역시 여전히 ‘맛없음’ 목록에 있지만 상황에 따라 먹기도 한다. 김치는 조금 좋아졌다. 나는 평생 김치 안 먹고 살 줄 알았는데 입맛이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던데 나는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내 동생도 그때 비하면 다른 사람이다. 지금은 뱃살이 다 사라졌다.

 동생과의 관계도 점점 유해졌다. 된소리가 줄었다. 동생을 떠올리면 ‘짜증’이란 단어가 최상단에 있었는데, 자극적인 맛을 덜어내니 ‘자중’이란 말로 바뀌었다. 덜 싸우고 덜 소리 지르니 나도 조금 ‘사람’다워졌다. 떡국 많이 먹고 어서 어른 되기를 바라던 아이였는데, 어른은커녕 성인의 나이에 다다라 겨우 김치 먹고서 겨우겨우 사람이 되었다.

 어른 되려면 반찬 말고 말을 편식해야 한다. 나쁜 말은 삼키고 좋은 말은 뱉어야 한다. 나쁜 말은 내가 먹고 좋은 말은 내어주어야 한다. 내가 본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었다. 나에게 좋은 말만 내어주고 잔반처럼 남은 나쁜 말은 깊은 곳에 삼켰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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