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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Aug 20. 2023

멀리 돌아가는 길

 초등학생 때 ‘사춘기’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 보다. 사춘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른인 척하다 보니 중학생 때 나는 진지하게, 내 정신은 다 자랐다고 판단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 그때는 어렸구나. 이제 진짜 다 컸다.’라고, 대학생 되어서는 ‘아, 이번에야말로 진짜 어른이다.’라고 착각했다. 군대 가서 처음으로 ‘아, 나는 너무 어리다. 죽기 전까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멀리 있는 고등학교로 진로가 정해졌다. 엄마는 내가 자취하길 바랐는데 나는 가족 없이 사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함께 이사 갈 것으로 생각했다. 여러 번 이사했으니까 이사가 별거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가 보니 자취하는 친구가 몇 명 있었다. 학생도 혼자서 살 수 있는 거구나, 뒤늦게 알았다.

 나 때문에 엄마와 동생도 거처를 옮겼다. 아빠는 직장 근처에 살며 주말에만 집으로 왔다. 우리 집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바퀴벌레가 많았다. 여름이면 모기가 들끓었다. 그래도 살다 보니 다 적응이 되었다. 거기서 일 년인가 이 년 살고 임대주택 청약이 되어서 다른 아파트로 갔다.

 “나 그냥 혼자 살까? 자취하면 되는데.”

 때늦은 불평에도 엄마는 순하게 대꾸했다.

 “벌써 이사 왔는데 어떡해.”

 엄마가 나 혼자 살도록 원룸을 구해주었으면 나는 굶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계란후라이와 라면 말고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리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집 평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관리비가 뭔지도 몰랐다. 내 옷 치수를 몰라 살 때마다 엄마에게 물었다.

 내가 사는 세계는 화분처럼 작았다.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이 많았다. 나만의 사전에 단어를 등재하거나, 나만의 보드게임을 만들거나, 나만의 만화를 그렸다. 자발적인 일기도 그때 처음 썼다. 아니면 컴퓨터 게임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서였을까. 내 몸 밖의 일에 신경을 안 썼다.


 내 사전에 ‘눈 뜨고 잠자기’라는 단어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 눈은 선생님을 보면서 딴생각하는 기술이었다. 잠을 잔 것처럼 수업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한 시간이 오 분처럼 지나갔다. ‘안 어색함’이란 단어도 있었다. 그 시절에 누구와 같이 있으면 아무 말 없는 것이 편했다. 남들은 어색하다고 하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대화를 피했다. 귀를 닫았다. 그래서 나는 얻는 게 없었다. 바보가 되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몰랐고, 그들 사투리의 주인을 구분하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 할 때는 중학생이었는데, 우리나라 축구 이긴 것을 뉴스로 보았다. 연예인이나 예능 프로그램도 관심 없었다. 학교 안에서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 누가 누구랑 싸워서 이겼다더라, 이런 가십은 어린애들 유치한 놀이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알고 보니 어른들도 이런 걸 좋아한다는 충격적인 사실.

 종종 거울을 보았지만, 나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두발 규정이 성가셔서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 키나 몸무게를 재면 기억하지 않았다. 계속 바뀌는 것을 기억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신발 사줄 때 몸이 자랄 것을 고려해서 한두 치수 크게 구매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렇게 했다. 고등학교 때 280mm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지금 내 신발 크기가 270mm다. 시간 지나면 발이 커지겠지 했는데 안 커져서 덜렁거리며 다녔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 그 대가는 길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학교 가는 한 길 말고는 돌아다닌 곳이 거의 없던 결과로 드디어 탈이 난 것이다. 고등학교 등교 첫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을 잃었다. 갈 때는 잘 찾아갔는데 올 때는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어려웠다. 걸어서 하교할 때마다 몽상하던 게 습관이 되었을까. 정신 차리려고 고개를 살짝 들고 걸었다. 아파트 단지는 나오지 않고 하천 건너 병원, 다시 하천 건너 병원이 반복되었다. 돌고 돌아 집으로 갔다. 다음날도 길을 헤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걷는 걸 좋아해서 길을 헤매는 것이 문제 되지 않았다. 며칠 헤매면 될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날씨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엄마는 새 직업을 찾았다. 종합병원에서 조리실 업무를 했다. 입원 환자들 먹일 밥을 하고 급식 나르는 일을 했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도돌이표처럼 돌았다. 엄마는 어디서 일하든지 최선을 다해서 미움받지 않았다.

 동생은 나 때문에 덩달아 전학 갔는데 학교가 멀었다.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동생은 학교 가기 싫어서 안 갔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동생에게 그때를 물어보면 “그냥, 그런 날 있잖아. 학교 가기 싫은 날.” 가벼운 일탈로 여겼다. 실제 사정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작은 일에도 심각해지는 나와 달리 동생은 이런 일에 있어서 조금 더 유연했다. 평소에는 나랑 닮은 것 같은데 어떤 상황에서는 달랐다. 자유로웠다. 노랑나비 같았다. 성인 되어서 동생은 드럼을 치더니 음악 밴드를 결성했고, 전문 장비를 갖추어 자전거를 탔고, 혼자 유럽 여행을 갔고, 주짓수를 배웠다.

 동생과 다르게 나는 지각 한 번 안 하는 학생이었다. 엄마도 나와 비슷해서 동생의 결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음 날은 잘 등교했는데 학교 안 가는 날이 몇 번 더 생겼다. 엄마는 일 년이 안 되어 병원에서 밥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동생을 챙기는 데 힘을 쏟았다. 아침에 깨워서 옷 입히고 밥 먹여서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엄마는 동생이 다시 학교에 잘 다니자 이번에는 생선 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어부가 생선 잡아 오면 손질하고 포장하는 걸 대량으로 하는 곳이었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내가 싫어하는 생선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그즈음에 나는 주민등록증 만들러 오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곧 사회 구성원이 되어 조국의 번영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할 것만 같았다.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고 국가에서 주는 인증서 같아 그 문서를 오래 보관했다.

 아쉽게도 주민등록증이 나의 성숙함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하굣길의 망상은 풍선처럼 자라났다. 집에 가는 길에 내 머리에서 나온 풍선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집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줄은 모두 끊어졌다. 새로 돋아난 상상은 낮은 천장에 막혀 하늘로 뜨지 못했다. 운동장에 산다면 높은 천장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손 닿는 거리의 뜬구름은 나를 부끄럽고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일기장에 욕을 하기 시작했고,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다.

 빨리 집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었다. 부모와 사는 건 애 같았다. 점점 엄마와 아빠, 동생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관심을 꺼버렸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화분을 따라 어둡고 습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사춘기가 나를 찾아오지 않아서 불만이었다.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화분 안에 살면서 운동장을 꿈꿨다.


 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통학버스 타고 다녔는데 학교 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다. 동생이 늦게 일어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엄마도 일찍 나갔다. 동생은 버스를 놓친 날이면 학교에 안 갔다.

 엄마도 이번에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아침에 직접 동생을 학교까지 태워줬다. 학교와 일터는 반대 방향이었다. 출근 시간을 어떻게 조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매일 아침 1시간을 돌아갔다. 운전도 잘 못하는데 먼 길을 둘러 생선 손질하러 갔다. 돌아가는 길에 비만 안 오면 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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