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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Jul 02. 2023

구멍 난 문

 엄마는 맏딸이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이 둘 있다. 내게는 큰이모, 작은이모가 되는 셈이다. 어렸을 때 가까이에 살아서 이모들은 친숙한 존재였다. 학교에서 가족 관계도를 보여 주며 빈칸 채우기를 했다. 한 칸에는 ‘이모’, 다른 칸에는 ‘삼촌’을 넣어야 했는데, 나는 ‘삼촌’이란 단어의 존재를 몰라서 한 칸에는 ‘큰이모’, 다른 칸에는 ‘작은이모’라고 썼다.

 엄마는 작은이모가 하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독립해서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나는 어린이집 건물 안에서 우리 가족이 거주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 작은이모와 함께 살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손자 손녀 밥 차려주는 일상적인 모습이 눈에 선하고, 작은이모가 밤마다 조카들 재우면서 자신은 TV 영화 보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모는 우리를 억지로 재웠지만 우리는 항상 졸리지 않았다. TV 소리가 궁금해서 이불을 빼꼼 내리면 이모가 “어딜.” 하면서 이불을 덮었다. 무슨 사정인지 우리 옆에는 24시간 어린이집에서 머무는 원아들도 몇 명 함께 누워 있었다. 그들의 엄마는 한 달에 몇 번 아이를 보러 왔다. 엄마 오는 날에 그 아이들은 예민해져서 저녁에 문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 밤이 오면 그곳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상봉’의 의미를 눈으로 배웠다.

 내 머릿속에는 작은이모가 하던 어린이집, 엄마가 하던 어린이집이 혼재되어 있다. 나중에는 큰이모도 어린이집을 했다. 엄마는 나와 다른 기억을 가졌다. 그때 어린이집으로 출퇴근했고 우리가 그곳에 살지는 않았다고 했다. 우리의 기억은 맞춰지지 않는 퍼즐처럼 안개로 자욱하다. 내 안에 선명한 조각들이 남아있지만, 진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사거리 한쪽 건물 1층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중간층에 화장실이 있었고 2층이 어린이집이었다. 나는 저학년이었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스무 명 정도의 동생이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무공 풀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 있었고, 한 곳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합판으로 만든 미끄럼틀이 있었다. 미끄럼틀 정상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알록달록한 성으로 통했다. 작은이모는 ‘너희 아빠가 목수 일을 할 때 만들어준 미끄럼틀과 성’이라고, 여러 번 말해줬다. 내게 자부심을 주기 위해 그러셨던 것 같다. 혹은 조카들이 멀리 사는 아빠를 그리워해서 그러셨을 수도 있다.

 작은 통로를 지나가면 방이 나왔다. 왼편에는 화장실과 부엌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산 지 얼마 안 된 침대가 있었다. 그 부엌에서 나는 할머니에게 숟가락을 던진 적이 있었고, 그 침대 위에서 동생과 함께 방방 뛰며 “천사를 싸바싸바” 가요를 부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먹는 것에 관해 주의를 주었다.

 “아이들 보는 앞에서 절대로 혼자 뭘 먹으면 안 돼. 다른 애들도 다 먹고 싶어지잖아.”

 아이들은 엄마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나는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나만 챙기면 다른 애들이 서러워할 것을 걱정했다. 엄마는 아이들 눈을 늘 신경 썼다. 모든 아이를 공평하게 대하려 했다. 엄마는 애들끼리 싸우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했는데, 사실 명확한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싸운 아이들도 서로의 기억이 달랐다. 옳고 그름은 오래된 기억과 마찬가지로 안개의 속성이었다. 그 짙은 하양 안에서는 그 어떤 저울로도 경중을 가릴 수 없었다.


 어떤 밤에 나와 동생 둘만 작은 통로 너머 방에 있었다. 그 방 밖 거실에서 고함이 오갔다. 할머니, 엄마, 작은이모가 큰이모와 싸웠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큰이모는 힘이 셌는데 말릴 사람이 없었다. 아빠가 만들었다는 나무 성은 진짜 성이 아니어서 아무 힘이 없었다. 고함은 점점 더 큰 고함이 되었다. 욕설이 들렸다. 중간에 엄마가 와서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말라고 했다. 나와 동생은 숨도 쉬지 못하고 침대 구석에 쭈그려 있었다. 큰이모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 형을 데리고 있었다. 자기 아들도 방에 들여보내야겠다고 했다. 나와 동생을 부르며 문 열라고 욕을 했다. 우리는 방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서로 밀고 당기고 팔이 엉켜 있는 모습이 소리로 전달되었다. 큰이모는 세 사람을 뿌리치고 문을 흔들었다. 실랑이하는 목소리는 멀어지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별안간, 나무로 된 방문이 부서지고 발이 튀어나왔다. 문에 동그랗게 구멍이 났다. 그곳으로 팔을 집어넣어 문을 열었다. 어른들이 뒤엉키고 그 사이로 친척 형이 떠밀려 들어왔다. 어른들은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형의 눈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나와 동생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형은 내게 와 주먹을 휘둘렀다. 동생이 옆에서 울었다.

 다음날, 구멍 난 문에는 아이들 공부하는 포스터가 붙었다. ‘가나다라’였는지 ‘ABCD’였는지 모르겠다. 성인 되어서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왜 싸웠는지. 젊었던 엄마는 왜 싸웠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싸웠던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모들에게서 감히 그 기억을 끄집어낼 수 없었다. 뿌연 곳은 뿌옇게 내버려 두었다.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눈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가 봐도 그랬다. 동그란 걸 넘어 땡그랬다. 보는 사람마다 눈이 예쁘다고 했다. 엄마가 동생 손 꼭 잡고 다니라고 해서 어딜 가든 손을 놓지 않았다. 버스 탈 때는 엄마가 따로 앉고 나는 동생이랑 나란히 앉았다. 앉아서도 동생 손을 잡고 있었다. 동생은 내 손바닥을 쭉 펴서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내가 가르쳐준 놀이였다.

 제주도로 이사 가고 나서 어린이집 스무 명의 동생은 다 사라지고 피가 섞인 동생 한 명만 남았다. 나는 질투가 심해졌다. 고학년이 되었고, 집에는 컴퓨터가 한 대 생겼다. 우리는 컴퓨터 하나를 두고 늘 싸웠다. 나는 눈을 감은 사람처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엄마는 시간제한을 두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컴퓨터를 하기로 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나는 양심껏 한 시간 삼십 분만 하고 나왔는데 스트레스받을 때는 두 시간을 했다. ‘스트레스’란 동생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의미했고 나는 동생이 컴퓨터 못 하게 방해했다.

 심하게 싸운 날, 동생 얼굴을 때린 적이 있었다. 동생은 울면서 집을 나갔다. 5분 후에 뒤따라갔을 때는 이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은 저녁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걱정되어서 살이 떨렸다. 퇴근한 엄마는 화가 났다. 돌아온 동생은 엄마한테 안겨 울었다. 나는 사과하려 했는데 못난 자존심에 그러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온 엄마는 우리가 싸우고 있으면 지친 몸을 이끌고 매를 들었다. 싸움은 엄마가 없을 때 발생했으므로 엄마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었다. 나와 동생은 서로 억울해했다. 둘 다 피해자가 되어 분노를 표출했고 거기에는 두 가지 진실이 공존했다. 엄마의 매는 빗자루일 때도 있었고 파리채일 때도 있었다. 너무 힘들었던 날은 매를 들기만 하고 때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대들기 시작했다.

 “엄마도 이모랑 싸우잖아!”

 엄마는 멈칫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내 키가 엄마랑 비슷했을 때였다. 조금 있으면 엄마 키보다 내 키가 더 커진다고, 엄마한테 우유 많이 마시라고 하던 때였다. 힘도 세졌다고 틈만 나면 엄마를 업으려 하던 때였다. 거실에서 부엌까지 엄마를 업어서 내려다 주고, “도착했습니다, 손님.” 하던 때였다. 엄마가 “고맙습니다.” 하면 나는 “택시비 주셔야죠.” 했고 엄마는 내 엉덩이를 톡톡 치던 때였다.

 빗자루를 든 엄마 팔이 힘없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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