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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Jun 18. 2023

순이는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엄마의 어린 시절 별명은 ‘순이’였다. 쌍둥이로 태어나자마자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쌍순이’로 불렸다. 된소리가 있어서 엄마는 그 호칭이 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이름을 물으면 ‘순이’라고 소개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순이를 불렀다. 학비가 부족하니 중학교 입학을 미루자는 설득이었다. 할머니 혼자 시장에서 일하며 세 딸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맏이인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순이는 순해서 순이였다. 일 년 지나면 중학교 보내준다는 말을 믿었지만, 순이는 평생 교복을 입어보지 못했다.

 열네 살에 학교 대신 식당에 다녔다. 기숙 생활하는 직장이었다. 월급날에는 할머니가 찾아와 월급봉투를 가져갔다. 그중 얼마를 쥐여주면 엄마는 그 돈을 모아 동생들 옷을 샀다. 집에 가는 길에 동생들 간식을 샀다. 동생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안쓰러움을 샀다.


 세월이 흘러 아들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고 엄마는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녔다. 중국어를 공부했다. 앞으로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점점 더 늘어날 터라서 중국어를 배우면 일거리가 많을 거로 생각했다. 과제도 있었는데 자판을 잘 치지 못하셔서, 엄마가 일러주는 내용을 내가 컴퓨터로 받아 적기도 했다. 무슨 내용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어질 인(仁) 자를 하도 많이 써서 무언가 어진 내용인가보다 했다. 인쇄된 종이가 나오면 “내가 할래.” 하면서 프린트한 종이를 책상에 탁탁 쳐서 각을 맞췄다. 공부하는 엄마는 ‘멋’ 그 자체였다. 식탁 위에 있는 엄마의 교과서와 늦은 시간 귀가하는 모습에서 생기가 전해졌다.

 나와 동생이 응원했지만 결국 엄마는 졸업 못 하고 중도에 포기했다.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공부를 멈추는 게 속상했다. 계속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밥 차리는 게 귀찮아서 차라리 굶고 마는 아들은 바쁜 엄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지인 소개로 식당에서 일했다. 관광객이 버스로 잔뜩 밀려오는 식당이었다. 사장님 딸이 내 동생과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가끔 식당으로 갔다. 엄마에게 무언가 전달해주거나, 엄마가 조퇴해서 함께 귀가하거나 하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 엄마는 설거짓거리가 담긴 큰 대야를 옮기고 있기도 했고, 더러워진 상을 닦고 있기도 했다.

 식당 일이 힘들어서 오래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지인 소개로 다시 식당에서 일했다. 이번에는 사장님 아들이 내 동생과 같은 반이었다. 먼저 다녔던 식당보다 손님이 더 많았다.


 그동안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니 버스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물리적인 활동 반경은 커졌지만, 내 마음의 그릇은 커지지 않았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10시 전에 잠들었다. 호기심이 부족해서 새로운 삶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거나, 버스 정류장 맞은편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리거나, 학원 근처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나는 특별한 일 없으면 곧장 귀가했다.

 집에서 놀기만 하는 아들이 불안했는지 엄마는 내게 학원을 권했다. 수학, 과학, 영어를 배우는 종합학원이었다. 학원 다니니까 성적이 올라갔다. 혼자서는 공부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점수 잘 나오니 기뻤다. 수동적인 내게 학원은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다. 꽤 멀리 있는 우리 집까지 학원 차로 태워주는 것도 좋았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내리는 학생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학생들이 다 내리고 둘만 남으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 경험이나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꺼내놓았다.

 방과 후 학원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가 비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PC방에 갔는데, 나중에는 돈이 없어 구경만 했다. 그러다가 누가 나를 파렴치한 짠돌이 취급하길래 그들을 멀리했다. 그때 나는 아주 좁은 사람이었으므로 장난으로 한 가벼운 말조차 쉽게 흘리지 못했다.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지 않아서 만화책을 빌린 적도 없고, 불량식품을 산 적도 없었는데, 모아둔 돈이 다 떨어져서 PC방도 끊게 되었다. 나중에는 매월 용돈을 받았지만, 쉽게 쓰지 않았다.

 대신 면사무소 옆 컨테이너 건물로 향했다. 컴퓨터가 열 대 정도 있는 ‘정보사랑방’이었다. 면에서 운영하는 공간이었는데 그 시간에는 초등학생들이 어른 몰래 게임을 했다. 나는 중학생이라 같이 게임 하기는 민망해서 인터넷 오목을 두었다. 한 번씩 관리자가 들어와서 게임 하는 아이들을 꾸짖곤 했는데 오목을 하는 건 혼내지 않았다. 거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학원에 갔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있거나 그 옆에 있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쨌든 학원 다니면 공부가 잘되니 학원 빠지는 일은 없었다.


 “학원 그만두면 어떨까?”

 엄마는 민망한 듯 웃었다. 내 눈치를 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 내가 고집부렸으면 엄마는 아들 의견을 따라줬을 것이지만 나는 쿨한 척했다.

 “안 다녀도 괜찮아.”

 학원 그만두면 성적이 떨어질 걸 알았다. 그렇지만 크게 아쉽지 않았다. 학원 친구들과 친했다면 아쉬웠을 텐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성적에 조금 더 집착했다면, 성격이 조금 더 활달했다면, 선생님이 내 미래에 대한 어떤 조언을 해줬다면 아쉬웠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원래 학원 안 다녔으니까 문제없다, 공부는 집에서 하면 그만이다, 하고 말았다.

 학원 차 타고 다니다가 오랜만에 걸어서 하교했다. 탈탈거리는 시외버스에서 창밖을 보면 가로수들이 뒤로 달리는 것 같았다. 거꾸로 거꾸로 달리다가 어느 순간 가로수들이 모두 사라지면 나도 저들 따라서 뒤로 가고 싶어졌다. 방지턱 쿵 넘으면 곧 내려야 하는 정류장이 나왔다. ‘삑’ 하는 버스 벨 소리는 틀렸다는 효과음 같았다. 먼저 내리는 이들 따라서 “감사합니다.” 음 없는 인사를 기사 아저씨에게 던졌다. 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었다. 학원 다닐 때는 저녁에 집에 가니 이 길이 어두웠는데, 날이 환했다. 사실 나는 원래 걸어 다녔다는 걸 깨달았다. 학원 다니기 전에는 늘 이렇게 30분 걸어서 집에 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옛 생각을 자주 했다.

 ‘아,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어릴 때가 좋았는데. 참 세월이 빠르다.’

 중학생 나는 초등학생 나를 그리워했다. 그 습관이 남아 어른 돼서도 혼자 걸을 때면 과거로 과거로 침전하곤 했다. 가라앉은 침전물 사이를 떠돌며 시간을 보냈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 계절이 변했는지 해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어떻게 방법을 찾았는지 다시 학원에 다녀도 된다고 했다. 돌아간 학원에서 친구들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로 지냈다. 다시 성적이 올랐다.


 어렸을 때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순이야.”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순하시다. 엄마의 안쓰러움은 응당 아들이 기억해야 할 몫이다. 엄마는 중국어 공부했던 것 다 까먹었지만, 그 젊음은 아들이 보고 배웠다.

 나는 엄마가 학교 덜 다닌 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검정고시 합격하고 자격증도 따고 대학 공부까지 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열심히 해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거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

 엄마 말씀 따라서 잘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할 수 있을 때’가 약간 지나긴 했다. 그래도 엄마 본받아서 할 수 있는 공부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하고 있다. 요즘은 글쓰기 공부를 한다. 얼마나 큰 복인지 알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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