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어린이에게 지원하는 수업이 많았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엄마는 구나 시에서 추진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신청했다. 나는 성악과 민요를 배웠다. 탁구 교실도 있었다. 엄마는 자녀에게 좋은 거라면 다 해주고 싶어 했는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귀가한 내게 수업은 어땠는지 자주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거나 그냥 그랬다는 둥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애매모호한 답이 진심인, 크게 감흥이 없는 아이였다. 일기를 쓸 때 ‘느낀 점’을 적는 칸이 늘 문제였는데, ‘느낀다.’라는 게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다 온 걸 일기장에 옮길 때 “그래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 유도신문을 하셨지만 나는 ‘그냥 놀고 온 건데.’ 무심하게 한마디 했을 뿐 딱히 떠오르는 무언가가 없었다.
학교에서 보내오는 가정통신문에 ‘뭔가 참여 활동이 있으니 고려해보라’라는 의견이 있으면 엄마는 흘려보내기 힘드셨나 보다. 입상은 못 했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가보고, 우주소년단에도 가입했다.
방과 후 활동 중에서 악기 연주 수업이 있었다. 바이올린과 플루트 중 하나를 골라 배울 수 있었다.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수업이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수업이라 강습비가 저렴했지만, 악기를 자비로 사야 했다. 20만 원 정도로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금액이었다.
“이거 하고 싶어?”
두 번 물으셨다. 보통의 나라면 엄마의 작은 파동을 눈치채고 안 한다고 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항상 내 마음을 궁금해하셨다.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하셨다.
엄마는 큰마음을 먹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플루트를 사 주셨다. 큰마음 먹을 때 체하지 않으려고 마실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플루트 수업은 재미있었다. 악기 소리도 좋았고, 선생님도 좋았다. 처음에는 악기 머리 부분만 잡고 소리 내는 연습을 했다. 바람 새는 소리만 나다가 처음으로 ‘우웅’ 악기다운 소리가 나니까 기분이 정말 좋았다. 바람을 계속 불어야 해서 어지러울 때가 있었지만 익숙해졌다. 소리 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손가락이 즐거웠다. 내가 내뱉은 숨이 관을 타고 흘러 음을 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와 반짝이는 소리를 조각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었다.
나는 플루트를 보물처럼 다루었다. 실수로 떨어뜨리면 와장창 소리가 났는데, 내 마음에도 금이 갔다. 침이 악기 안으로 많이 튀었기 때문에, 청결 관리가 중요했다. 긴 막대에 천을 끼워 안쪽까지 청소했다. 검은색 플루트 케이스를 찰칵찰칵 잠그는 내 모습이 첩보요원 같아 멋있어 보였다.
우리 반에는 못된 녀석이 하나 있었다. 플루트를 조립해서 칼처럼 휘둘렀다. 남자애가 별로 없었는지 나에게 자꾸 칼싸움을 요청했다. 나는 엄마가 큰마음 먹고 사준 플루트를 험하게 다룰 수 없었다. 그 아이는 결투가 거부당하자 나를 괴롭혔다. 나는 검은색 플루트 케이스를 품에 안고 그를 피해 도망 다녔다. 다행히 몇 번 수업 후 그 친구는 그만두었다.
학교 연주회에서 무대에 올랐을 때는 그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공연을 마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청중의 박수 소리는 희열을 느끼게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친구들과 무대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한쪽에서 선생님과 대화했다. 우리 애는 어떤가요, 소질이 있나요. 선생님은 좋은 말만 해주었다. 이 정도면 훌륭해요.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죠.
제주도로 전학 가면서 플루트 수업도 종료되었다. 엄마가 더 아쉬워했다. 엄마는 내가 꾸준히 플루트를 연주했으면 했다. 어른 되어서도 취미로 하길 바랐다. 나는 학교에서 음악 수행평가로 악기를 연주해야 하면 플루트를 불었다. 하지만 혼자서 연습하는 게 어려웠다. 책 보면서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이미 의욕이 사라진 상태였다.
엄마는 수소문해서 강사를 구했다. 나는 강습비를 물었는데, 1회에 몇만 원이라는 말에 기겁했다. 다른 애들처럼 리코더 불겠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까지 배운 게 아깝다고,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얼굴에 설득당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강사에게 몇 회 정도 수업을 받았다. 수업료로 비싼 돈을 내는 게 아까웠다. 아까우면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이미 흥미를 잃었기에 더 이상 서울의 연주회에서처럼 청아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실력도 없으면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게 창피했다. 비싼 악기가 아까워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6학년 음악 시간 수행평가 때 플루트를 불었다. 선생님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은 서울에서 온 학생이 플루트 부니까 부잣집 애라고 인식했나 보다. 너네 집 잘 살잖아, 했을 때 별 대꾸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졸업식 때도 플루트를 연주했다. 중학교 수행평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플루트에 입을 대지 않았다. 검은색 케이스는 점차 빛을 잃었다. 집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엄마도 미련을 접었다. 옆집 누가 플루트 갖고 싶다는데 안 쓸 거면 줄까? 물으셨다. 그때는 또 내 마음에 아쉬움이 생겼다. 남에게 주기는 아까워서 동생 쓰라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룰 줄도 모르는 동생 핑계를 대면서 대화를 피했다. 또 몇 년 후에 엄마가 다른 집에 줄까? 해서 알겠다고 했다.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플루트는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등학교 수행평가는 리코더로 보았다. 주위의 주목을 받지 않아서 좋았다. 부자라고 오해받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왜 싫었나 생각해 보면 고된 삶을 살아온 엄마가 부정당하는 느낌이라 그랬나 싶다.
일기장의 ‘느낀 점’은 서서히 채워졌다. ‘재밌었다, 좋았다’ 말고 다른 감정을 하나씩 찾았다. 플루트는 좋은 도구였다. 불어넣은 숨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 선율이 자라나 환희와 긴장과 애수와 명랑을 표현했다. 그 맛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음에도 나는 풍성해졌다.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플루트 대신 세상 이곳저곳에 대고 ‘후’ 바람을 불어보았다.
반대편에서 엄마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열심히 내뱉지 못했을 때도 엄마는 힘껏 들이마셨다. 비싼 강습비 내주기 위해 작은 몸을 움직여 노동했다. 엄마는 그때 식당에서 서빙하고 설거지했다. 집에 와서도 청소하고 설거지했다. 귤 철 되면 남의 밭 일꾼으로 귤 따러 다녔다. 식당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었는데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식당 일을 했다. 어깨가 아프다고 주물러 보라고 하셨다. 낡은 열 찜질기가 안방 이불 근처에서 오랜 세월 함께했다. 이십 년 흘렀지만, 지난주에도 어깨 통증이 너무 심해 잠을 자기 힘들었다고 하셨다.
나는 어릴 때 엄마가 힘든 걸 몰랐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내가 조금만 도와드렸다면 늘 마셔서 고이기만 했던 엄마의 숨도 조금은 트일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느낀 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기장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내가 되어 다행이었다. 엄마 덕에 나는 좋은 안경을 낀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일방적인 숨을 후회하고 긴 호흡을 배워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