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가족은 아빠가 혼자 살던 제주로 이사했다. 새로운 환경에 스며들었다. 그 지명이 ‘아빠가 사는 곳’에서 ‘내가 사는 곳’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길게 이어졌다.
전학 간 초등학교는 작은 시골 학교였다. 전교생이 백 명을 조금 넘는, 한 학년에 한 반이 전부인 학교였다. 이곳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같이 수업받아야 했다. 매년 전학생이 오고 갔기 때문에 똑같은 학생으로만 유지된 건 아니었다. 할머니와 사는 가정이어서 그랬는지 어떤 친구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노인처럼 사투리를 구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농 교류’ 한다고 시내 학교로 가서 하루 수업받았을 때, 적잖이 놀랐다. 같은 제주도였는데도 쓰는 말투에 차이가 컸다. 도시 학생들의 사투리는 쉽게 이해되는 편이었다.
운동회 전에 팀별로 큰 기(旗)를 준비해야 했는데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학교 뒤에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6학년 형을 필두로 낫이나 톱을 하나씩 들고 갔다. 거기 간 모두가 모기에게 온몸을 물어 뜯겼다. 열한 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이 모기 물린 전례가 없었다. 대나무를 베어 깃대로 삼고 그 끝에 팀별로 깃발을 매달았다.
얼차려 문화가 있었다. 한두 살 많은 형들이 4학년 소년 넷을 운동장 구석으로 호출했다. 우리는 고개 숙이고 손을 앞으로 모았다. “엎드려.” 하고는 각목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동급 여학생들이 선배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교실로 돌아왔다. 한 남학생이 여학생들에게 선배 보면 인사 좀 하라고 말했다. 선배에게 맞았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여자가 잘못해도 남자가 대신 맞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학교 운동장 외곽을 ‘제밤나무(구실잣밤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제밤을 주워다가 까먹었는데 많이 먹으면 혓바닥이 따가웠다. 그 나뭇가지가 적당히 높아서 남학생들은 돌담에서 점프해 매달리는 놀이를 했다. 형들 따라 뛰었다가 나뭇가지에 손이 닿지 않아서 똑 떨어졌다. 아팠는데도 창피해서 티 내지 않고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면(面) 내에서 제일 유명한 ‘무슨 무슨 의원’이었다. 오른팔을 통으로 깁스했다. 다음 해에는 친구와 장난치며 뜀박질하다가 넘어져서 왼쪽 팔에 깁스했다. 그다음 해에는 다시 오른팔에 깁스했다. 깁스하면 석고 안쪽 피부가 너무 간지러웠다. 엄마한테 간지럽다고 칭얼대면, “그래도 참아야지 별수 있어.” 하셨다.
엄마들끼리 따로 돈을 모아 선생에게 이것저것 해주는 게 많았다. 6학년 졸업할 때는 갹출해서 담임 금반지를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이런 문화를 싫어했다. 안방에서 작은이모와 통화하면 ‘서울에서도 그러니?’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엄마보다 여덟 살 어린 작은이모는 ‘요즘 세상’이란 단어를 좋아해서, ‘요즘 세상’에 아직도 그런 게 있느냐고 했을 것이다. 엄마는 이모와 통화하면 기분이 풀어졌다.
학교 선생님과의 첫 면담에서 ‘시골 학교라 숙제 없다.’ 소리를 들었던 엄마는 사교육 학습지를 신청했다. 방문 선생님은 자주 바뀌었다. 젊은 학습지 선생님이 엄마에게, 유행하는 책도 아이들을 위해 사주시라고 권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이야기였는데 엄마도 나도 잘 몰랐다. 엄마가 “제가 잘 몰라서요.” 했는데 선생님은 “어머님, 요새는 애들이 다 알아요. 그렇지?” 하며 나를 보고 질문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는 대답을 기대한 선생님이었지만, 나는 그때 해리포터를 잘 몰라서,
“친구들?”
이라고 대답했고 당황한 선생님의 웃음이 이어졌다. 그래도 그 선생님은 침착하게 “이거 보세요, 다 안다니까요?” 말을 이어갔다.
엄마는 시간이 나면 자녀와 나들이 가고자 했다. 바닷가에 가거나 오름을 걷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영화박물관’에 여러 번 갔다. 영화 소개하는 작은 CD를 무료로 주었는데, 그걸 받아 오면 기분이 좋았다.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한라산을 두어 번 올랐다. 여름에도 가고 겨울에도 갔다. 나는 날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동생은 따라쟁이여서 내가 뛰면 같이 뛰고 걸으면 같이 걸었다. 한참 가서 뒤돌아보면 엄마는 보일 때도 있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 시야와 상관없이 엄마는 천천히 올랐다. 벤치에 앉아 쉬면서 올랐다. 나는 빨리 가자고 졸랐다. 내가 멘 가방이 무겁다고 하면 엄마가 대신 들어주었다. 안에는 물병과 김밥과 겉옷이 있었다.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서 싼 김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오이를 잘 먹지 않았는데 김밥 안에 든 오이는 어쩔 수 없이 먹었다.
겨울 한라산은 동네에 사는 한 살 어린 친구네 모자와 함께 갔다. 꼬맹이 셋이 눈산을 손으로 짚으며 강아지처럼 뛰어 올라갔다. 내려올 때는 썰매 타듯이 앉아서 미끄러지며 내려왔다. 포댓자루 같은 것도 없이 바지 입은 엉덩이 그대로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면 등산로가 미끄러워져서 다른 등산객들이 위험하다고 지적받은 뒤로는 걸어서 하산했다. 하지만 이미 바지와 속옷은 다 젖은 후였다.
나와 동생은 엄마 아빠가 대화하는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친구들에게는 제주 말을 써서 “밥 먹언?” 했지만 동생에게는 내려가는 억양의 ‘-했나?’를 써서 “밥 먹었나?”라고 했다. 혹은 표준어로 “밥 먹었어?” 하기도 했다.
집 안에서는 욕을 쓰지 않는 규칙이 있었다. 의사봉 땅땅땅 두드리며 제정한 건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가 욕을 쓰면 엄마에게 일렀고, 욕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꼈다. 이 규칙은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종종 깨졌는데 동생과 싸우지 않을 때는 잘 지켜졌다. 우리 가족은 언어에 보수적이라 비속어나 신조어를 잘 쓰지 않았다. 어느 날 동생이 학교에서 유행어를 배워왔을 때, 나는 못마땅했다.
“헐~.”
보통 비꼴 때 사용되었던 이 단어는 상대의 실수가 어이없다는 의미였다. 뒤꼬리를 쭈욱 빼면서 늘어뜨리는 말투가 영 볼썽사나웠다.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했는데 동생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졌다. 나중에는 내가 더 많이 썼다.
엄마는 정리 정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런색 갈대 빗자루로 쓸고, 보라색 플라스틱 쓰레받기로 담고, 낡아서 희미해진 걸레로 열심히도 닦았다. 시간 나면 이불이나 베개를 빨았다. 꼭 내가 컴퓨터 게임 할 때 이불을 털자고 나를 불러서 ‘잠깐만요!’를 서너 번 해야 했다.
그러나 오 년, 십 년 후에 엄마의 육체는 점점 망가졌다. 집으로 퇴근했을 때 청소나 정리를 버거워했다. 손가락에 주름이 생겼고 어깨는 늘 뭉쳐있었다. 한의원에서 침 맞고 부항 뜨고 해도 소용없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의사 되고 싶다고 하니까 파스퇴르 위인전을 사주셨다. 엄마는 점차 바빠져서 자녀 학업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겨우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주말에도 일했기 때문에 자녀와 놀러 나가는 일은 점차 벅찬 활동이 되었다. 직장 동료와 사투리로 대화하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도 나처럼 집에서 쓰는 말과 직장에서 쓰는 말을 다르게 했다.
엄마는 서서히 서울 사람 같지 않아졌다. ‘서울 사람’이란 게 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고 ‘제주 사람’도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어딘가에 엄마의 사투리가 있었다. 우리 가족의 언어가 있었다.
식구(食口)는 ‘함께 밥 먹는 입’이라고 했는데, 그 입이 서로의 말을 나눠 먹는 것 같다. 엄마가 만든 반찬을 먹어서 그 안에 담긴 언어가 전해졌나 보다. 우리는 제주에 적응해 나갔는데, 제주 사람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20년 넘게 제주에 살았는데 누가 사투리 써보라 하면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