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일하던 아빠는 일 년에 서너 번 우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 우리가 제주도로 가기도 했다. 한 번은 동생 손을 잡고 둘이서만 간 적도 있었다. 엄마는 애들끼리 어떻게 가냐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잘 다녀왔다. 스튜어디스 여럿이 우리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던 것이 기억난다.
아빠가 서울로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입꼬리가 3도 정도 더 하늘 방향이었다. 동생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셌다. 나도 그날이 오면 태권도 학원 끝나자마자 집으로 뛰어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 옆에서 자려고 이부자리를 깔았다. 하나뿐인 방은 엄마랑 동생 자라고 두고, 거실에 이불과 베개를 준비했다. 아빠가 씻고 나오자마자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랑 둘이 잘 거라고,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고 자랑했다. 아빠 옆에 누웠는데 엄마가 씻고 오라고 했다. 씻고 왔더니 내 자리에 동생이 누워 있었다. 아빠는 내게 반대쪽으로 오라고 했는데 나는 동생을 밀어냈다. 내 자리니까 나오라고 했다. 아빠는 밀지 말고 이쪽에 누우라고 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엄마한테 가서 아빠는 동생만 좋아한다고, 아빠 밉다고 했다.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니 아빠가 오는 날은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아빠 없이도 잘 지냈다. 운동회에 아빠가 오지 않아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빠보다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한다거나 친구와 놀이터에서 만난다거나 하는 게 더 중요했다.
나와 다르게 엄마는 시간이 지나도 힘들었나 보다. 아빠한테 갈까? 아빠랑 같이 살까? 묻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는 아빠가 계신 제주도에서 살기로 했다. 짐을 다 싸고 이사 가기로 한 날에 비가 많이 와서 배가 결항 되었다. 덕분에 그날은 학교에 안 갔다. 신이 나서 동생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다음날 제주 가는 배를 탔다. 이미 여러 번 방문해서 그날의 제주가 특별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엄마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겠지 싶다.
엄마는 아빠 만나고 처음 비행기를 탔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는 제주행 비행기였다. 할머니는 결혼 날짜를 바로 잡아 오셨다고 했다. 자고 가라고 하여 엄마는 첫 대면과 함께 시댁에서 하루를 묵었다.
결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제주에서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까지 했다. 사진 속 엄마 아빠는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영락없는 신혼부부였다. 둘은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내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이사했다. 엄마는 낯선 섬에서 시어머니와 같은 마당을 공유하며 가까이 살았다. 엄마 눈에 할머니는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다. 시집살이였는데 편했다고, 오히려 할머니가 밥 차려준 때가 많았다고, 제주도 살 때 좋았다고 했다.
아들딸과 함께 다시 돌아온 제주도에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동생은 2학년이었다. 우리 집은 외진 곳이었다. 가까이에 오름이 있었다. 나무가 많은 길을 지나 200미터 정도 비포장도로를 건너면 우리 집이 나왔다. 눈이 많이 쌓인 날에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마당이 넓었는데 울타리가 없었다. 나무 몇 그루 서 있는 곳이 심리적인 마당의 경계였다. 방이 두 개였는데 큰 방은 나와 동생이, 작은 방은 부모님이 썼다. 침대 갖고 싶다고 하니 아빠가 나무 침대를 만들었다. 매트리스가 없어서 높은 바닥이나 다름없었는데 거기서 6년을 잤다. 컴퓨터 하나로 동생과 지치지도 않고 싸웠다. 엄마는 누런 갈대 빗자루를 매로 썼다.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통돌이 세탁기가 빨래하면 마당의 빨랫줄에 걸었다. 거실의 원형 탁자에서 네 식구가 밥을 먹었다. 브라운관 TV는 작았는데 SBS가 안 나오는 지역이라 친구들이 포켓몬스터 이야기할 때 통 끼지 못했다. 안방에는 엄마가 읽던 책이 있었다.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이었다. 엄마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나중에는 걸어 다녔다. 30분 걸어서 시외버스를 타면 곧 학교가 나왔다.
서울에서는 한 반에 서른 명 넘게 채워서 열세 반이 있었는데 여기는 전교생이 백 명을 겨우 넘겼다. 우리 학년은 남자 넷에 여자가 열두 명이었다. 운동장에서 축구 하려면 세 학년이 뭉쳐야 했다. 오가는 전학생이 매년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전학 첫날, 수업이 모두 끝나고 엄마가 데리러 왔다.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희 아들은 숙제가 없으면 공부를 안 해요. 선생님이 숙제 좀 많이 내주세요.”
중년 여선생은 귀찮아했다.
“여기 애들은 숙제 내도 아무도 안 해와요.”
엄마는 당황했다.
며칠 뒤,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얼떨결에 나갔다가 부반장에 당선되었다. 선생님은 규정을 보고 오겠다며 교무실에 다녀오더니, 전학생은 바로 입후보할 수 없다고 당선을 취소시켰다. 엄마가 들으면 실망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되었다.
엄마는 무엇보다 내 학교생활을 걱정했다. 2년 전에도 서울 내에서 전학 간 적이 있었는데, 사교성이 부족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잘 적응했다. 동창들이 다 착해서 좋았다. 사투리 알아듣기 어려운 것 말고는 문제가 없었다.
관찰자로서 나는 엄마가 제주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 보였다. 며느리에게 밥 차려주던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남편에게 기대고 싶어서 왔는데, 한 지붕 아래 사니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서울 사는 친정엄마와 갈등이 생겼지만 멀리 있던 탓에 감정을 풀지 못했고,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자식들은 틈만 나면 싸웠고, 아들은 대들기 시작했다. 돈 벌려고 힘든 일은 다 했다. 그래서 암에 걸렸다. 평생 술 담배 안 했는데 폐암이니 꽤 억울하다. 엄마를 보면 제주 공기 맑다는 것도 다 거짓이다.
그런데 엄마에게 서울이 좋아, 제주가 좋아? 물으면 둘 다 좋다고 했다. 장단이 있다고 했다. 둘 중에 한 군데서만 살 수 있으면 어디 고를 거야? 물어도 어디든 다 좋다 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했다. 엄마는 인생의 반을 서울에서, 나머지 반을 제주에서 보냈다. 반은 낳아준 가족을 위해 살았고, 나머지 반은 일궈낸 가족을 위해 살았다.
엄마는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회는 짧았고 시선은 늘 멀리 두었다. 지금 힘들어도 나중이 중요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꿋꿋이 버티면 나중에 돌려받는다고 생각했다.
암 진단을 받은 지 몇 년이 지났다. 처음 만났던 의사의 절망적인 소견을 떠올려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작년 말에는 걷기 힘들어 지팡이를 짚으셨다. 엄마를 부축해 병원 가는 비행기에 탔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새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수없이 타서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는데, 엄마의 옆얼굴 뒤로 두껍게 자리한 구름이 기억에 남았다. 딛고 서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멀리 보지 못했다. 옛 생각을 빈번히 했다. 돌아보기 일쑤였고 후회가 길었다. 과거에 사는 것 같았다. 엄마처럼 멀리 보아야 하는데 미래는 너무 슬픈 곳이라 잘 그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