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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Oct 21. 2023

가족사진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학교 연구실에 학부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내 잡무와 대학원 선배의 연구를 보조했다. 1년 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면접을 준비했다. 부모님과 양복점에 들러 정장을 샀다. 버튼이 하나짜리인 세련되어 보이는 옷이었다. 넥타이와 셔츠도 샀다. 엄마는 내게 옷이 잘 아울린다고 했다. 덕분에 면접을 잘 보았다.

 할 일이 많아서 졸업식은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졸업 앨범도 비싸서 안 샀는데 졸업식에 갈 실용적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석사 졸업하면 그때가 내 진짜 졸업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특별히 의미 부여할 것도 없었다.

 졸업식 당일에도 연구실에서 실험하다가 잠깐 과 사무실에 들러서 졸업장과 상장만 챙겼다. 더불어 제공되는 학사모와 학위복도 빌렸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사진 찍을 때 쓸 소품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부모님과 캠퍼스 여기저기서 자세를 잡았다. 자세라고 해봐야 ‘차렷’한 상태에서 웃는 것뿐이었다. 사진 찍으려고 보니 학사모가 너무 작아서 내 머리에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사이즈가 종류별로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주는 대로 받아 온 것이 잘못이었다. 과 사무실 직원은 내 학창 시절 내내 잘못된 정보만 전달해주었기에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의 실수였다. 다행히 엄마에게 학사모가 딱 맞았다. 엄마가 학사모를 쓴 모습을 보니 처음으로 효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빨리 무엇이든 되어서 다른 좋은 것들도 쓰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공부하는 건물 앞에서 사진 찍고, 가로수 길과 사슴 동상 앞에서도 찍었다. 짧은 시간 부모님과 학교를 둘러보고 나는 다시 연구실로 갔다. 하던 업무를 이어서 했다. 동생은 일이 있어 오지 못했다. 대신 저녁에 만나서 그때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우리 집에는 가족사진이 없었다. 다른 집 보면 액자에다가 까만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곤 했는데 우리 집에는 없었다. 내가 나서서 챙길 법도 했는데, 나는 내 앞의 일밖에 보지 못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면접 전에 산 양복을 입고 사진관으로 갔다. 동생과 아빠도 정장을 입었다. 엄마는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고 왔다. 오래된 옷이었다. 엄마는 정장이 없었다.

 촬영하는 동안 사진 기사 아저씨의 셔터가 번쩍번쩍 내리쳤다. 엄마는 사진 찍는 게 어색했다. 촬영을 마치고 사진관에서 후보를 몇 장 보여주었는데 제일 괜찮은 것으로 골라서 액자로 만들었다. 인화된 사진에서 나만 이가 보이게 웃었고 동생과 아빠는 살짝 미소만 띠었다. 엄마는 웃으려고 노력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 후 반년이 채 안 되어 석사 과정을 그만두었다. 연구실을 나왔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심리적인 문제가 컸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초라하게 했다. 부끄럽게 했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패배자는 이 소식을 가족에게 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의도 하지 않고 정해버린 이 결정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다시 지우길 반복했다. 마침내 이어진 통신망에서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나 학교 그만뒀어요.”

 엄마가 이유를 물어도 그냥 그렇게 됐어요, 하고 말았다. 엄마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통보하고 전화를 끊었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대화를 자주 하지 않는 아들이니까 소통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거라 단정했다. 그렇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외면했다.

 그때 내 마음은 황량한 벌판에 떨어진 것 같았다. 바닥에 뱉어진 껌이 되어서, 작고 어두운 벌레들이 내 위를 기어 다니게 두었다. 옆에서 털썩 소리가 났는데도 듣지 못하고 그것이 엄마 마음인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기숙사에서 짐을 빼고 집으로 갔다.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마주하기 힘들었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느꼈다. 내게 연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연구실에서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도 전화 한번 없었다. 군대 가기 전날 술자리를 함께했던 동아리 친구들. 군대 가는 날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학과 친구들, 모임 친구들, 십년지기 친구들. 내가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아무도 몰랐다. 내가 알리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연구실 선배로부터 자료를 찾는 사무적인 전화가 한 번 왔다. 그것으로 남아있던 내 존재 이유를 모두 끝마쳤다.


 오래된 친구에게 연락이 온 건 처박혀 산 지 근 두 달만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친구가 가업을 잇기로 한 상황이었다. 혼자서 일을 다 하기에 너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내게 동업을 제안하려 전화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아직 대학원에 다니는 줄 알았고 나를 설득해서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며칠 뒤에 그 친구와 만났다. 동업 말고 직원으로 일하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일구신 가게인데 내가 끼는 것이 맞지 않다고 했다. 아무튼 그 친구 덕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 친구 집에서 숙식하며 함께 생선을 팔다가 약 1년 뒤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갔다.

 낯선 해외에서 고생을 꽤 했다. 야간 청소일을 했다. 펍과 편의점,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자정부터 아침까지 청소했다. 그다음에는 도축공장에서 반년 일했다. 일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아주 힘든 날에는 캐리어 깊숙이 숨겨두었던 가족사진을 꺼내 보았다. 명함 크기 정도의 사진 속 환하게 웃는 나와 웃을 듯 말 듯 한 아빠와 동생, 그리고 엄마. 그날의 사진관이 생각났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걸리게 된 액자가 떠올랐다. 안방 한쪽 벽에 어색하게 달린 액자. 타국에서 지내니까 가족이 그리웠다. 군대에서보다 훨씬 더 그리웠다. 여전히 전화는 잘 안 했지만, 가족이란 존재가 얼마나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지탱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사진 찍어두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호주 생활 중, 하루는 꿈에 엄마가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불안해서 눈물이 났다. 꿈에서 엄마가 돌아가셨고, 나는 울면서 잠에서 깼다.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져 내렸다. 날이 밝자마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에 전화했다. 다행히도 엄마는 아무 일 없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안부를 물었는데 엄마는 내 걱정을 한참 늘어놓다가 엄마도 잘 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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