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TV가 고장 났다. 컴퓨터 게임 한 시간 하고, 나머지 시간에 라디오를 들었다. 점점 중독되어서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기도 했다. 시간별로, 채널별로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 파악해서 이것저것 들었다. ‘박수홍, 박경림의 FM 인기가요’를 제일 좋아했다. 배우 차태현이 깜짝 게스트로 자주 나왔는데 ‘차이에나’, ‘차이러스’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그거 끝나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이어졌다. 새벽에는 가수 신해철이 하는 프로그램을 어쩌다 들었다. 방학이 끝난 후에는 잘 듣지 않았지만, 이따금 라디오를 틀었다.
나는 한 번도 사연을 보낸 적이 없었다. 글을 쓰는 것이 낯간지러웠다. 특히 상담하는 코너에 사연을 적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자신의 마음속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성향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복잡한 상황이 얽히고설켜 있는지 잘 모르는 생판 남에게 왜? 나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래도 듣는 건 재밌어서 남들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따라쟁이 동생도 나 따라서 라디오를 들었다. 나와 다른 점은 조금 더 적극적이어서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즈음에 인터넷이 발달하여 우편 대신 온라인으로 사연을 보내는 시스템이 생겼다. 어느 날 동생이 라디오를 듣다가 자기 사연이 나왔다고 소리를 질렀다. 공 카세트테이프를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녹음은 하지 못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마였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냉장고가 고장 나서 엄마가 서비스 센터에 전화했다. 방문 기사가 도착했고 냉장고를 이리저리 보더니 하는 말.
“고객님, 이건 저희 제품이 아닌데요.”
LG 냉장고인데 모르고 삼성 직원을 불렀다는 일화였다. 라디오 작가들은 확실히 전문가여서 이 한 줄짜리 이야기를 재밌게 부풀려서 방송에 내보냈다. 동생은 엄마가 퇴근해서 돌아오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열성으로 이야기하는 동생의 기운에 엄마까지 함께 신나 보였다.
어린 동생은 사연 적을 때 주소를 기재하지 않았다. 라디오 DJ가 “주소 적어주시면 선물 보내드릴게요” 했다. 동생은 당장 주소를 적어 올렸다. 기다려도 선물이 오지 않아서 여러 번 다시 글을 올렸는데, 선물은 끝내 오지 않았다. 동생은 방송국에 실망했다. 나도 나란히 실망했다.
세월이 흘러 동생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좋은 성적으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취직했다. 낯선 곳에서 못된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나 보다. 우울 증상이 나타났다. 잘 먹지 못했고, 엄마와의 통화에서 눈물을 심하게 흘렸다.
엄마는 그때 식당에서 일을 했다. 동생을 가만두고 볼 수 없어서 일을 며칠 쉬고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만난 동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활기를 잃고 있었다. 엄마의 보살핌으로 동생은 조금 괜찮아졌지만, 엄마의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제주로 돌아가서 식당 일을 그만두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엄마의 어린 아기에게로 갔다. 옆에서 밥해주고 청소하면서 돌봐주니 동생은 기운을 되찾았다. 엄마는 동생이 이 위기를 극복해내길 바랐다. 원래 인생은 힘든 거니까, 세상 모두가 자신만의 힘듦을 지고 가는 거니까, 동생도 그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보조해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동생 생각은 달랐다. 그 병원을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상태는 나아질 수 없다고 보았다. 할 수 있다고 몰아붙이면 더 괴로워졌다. 엄마의 부정은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그즈음에 엄마 목에 알 수 없는 혹이 만져졌다. 병원 가서 보니 갑상선암이었다. 초기라서 수술하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갑상선 한쪽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딸 덕분에 일을 안 하고 있어서, 암을 발견하고 수술도 잘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결국 동생 뜻에 따랐다. 동생이 병원 그만두는 것에 동의했다.
동생은 제주로 와서 다시 간호사로 취업했다. 일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심적으로는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엄마는 수술 후 얼마 되지 않아 일거리를 찾았다. 지역신문의 구인 광고를 보고 어린이집에 새로 취직했다. 밤에 아이들과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오전에 퇴근하는 일이었다. 어린이집은 꽤 멀리 있는 곳이어서 차를 타고 한참 가야 했다. 아직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력이 약했는데도 밀어붙였다. 돈이 필요했다. 이렇게 강행하면 몸이 더 힘들어질 것을 예상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할만하다 싶었다고 했다. 엄마는 체구가 작아서 약할 것 같은데 철인처럼 살았다.
딸은 우울 증세를 보이며 일을 그만둔 상태였고, 남편은 직장에서 반년째 월급이 밀려 있었다. 아들은 취업 준비해야 할 시기에 학교 그만두고 도망치듯 해외로 떠났다.
엄마는 10년이 더 지나서야 후회했다. 그때 일을 멈추었어야 했다고. 무리해서 일했다는 걸 드디어 인정했다.
나도 후회했다. 가족의 의미를 너무 늦게 알았다. 내 인생은 절대 내 것이 아니었다. 내 행동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엄마에게 이어졌다. 내가 대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서둘러 취직해서 일찍 자리를 잡았다면,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동생이 힘들어할 때 내가 힘이 되었다면, 엄마의 짐을 덜어줄 수 있었다.
이걸 깨닫기 위해서 엄마의 삶을 응시했던 걸까. 가족은 서로 공명하는 존재인데 나는 엄마의 주파수를 모르고 살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사연조차 받지 못하는 고장 난 라디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