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더 이상 직장에 다닐 수 없을 때를 대비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귤밭을 보러 다녔는데 금귤밭이 싸게 나와서 금귤에 관심을 가졌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부모님은 만족했다.
어렸을 때 배가 아프면 엄마 앞에 벌러덩 누웠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배를 문질러 주었다. “엄마 손은 약손, 아들 배는 나아라.” 엄마의 요술 손이 몇 번 지나가면 진통은 가라앉았다.
주문을 외우던 그 손으로 이제 금귤을 땄다. 어린이집 퇴근하면 귤밭에 갔다. 밭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나는 나중에 밭일하는 데에 자주 동원되었다. 누가 내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무엇이냐고 물을 때 ‘밭일’이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밭일은 힘들면서 시간이 잘 안 가는 특징이 있었다. 노력의 결과가 나타나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연재해라도 오면 한 해 농사는 망치는 것이고, 무사히 잘 키웠다고 해도 도매로 팔았기에 우리처럼 소규모로 하면 벌이가 안 좋았다. 직접 소비자에게 팔아야 그나마 돈이 될 것 같았는데, 우리 가족 구성원 중 장사 수완이 좋다고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아빠는 월급 밀린 직장을 그만두고 소 목장에 취직했다. 소 가격이 엄청나게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 두 마리를 샀다. 집 뒷마당에 비닐하우스 양식으로 축사를 작게 만들어 소를 키웠다. 어미 소가 새끼를 낳으면 몇 개월 기르다가 우시장에 파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모르는 게 많아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하나씩 배워나갔다. 축사를 신고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과징금을 물은 후에 신고했다. 사료와 건초, 교배, 송아지 주사 맞히는 것 등 공부해야 할 게 많았고 계속 적자를 보았다. 나중에 흑자 난 해가 있었지만 겨우 용돈벌이하는 정도였다. 투입한 노동력 대비 비효율적이었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나를 호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나는 집에서 자꾸 부르는 게 싫었다. 엄마는 아들을 너무 좋아했다.
“아빠 혼자 하는데 얼마나 힘들겠니. 네가 와서 도와야지.”
나는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돈도 안 되는 것에 왜 이렇게 공을 들이냐고 했다. 소랑 밭이랑 다 팔라고 했다. 다 팔아서 그 돈으로 맛있는 거 먹고 여행 다니라고 했다.
“그 돈 다 쓰면 그땐 엄마 아빠 뭐 먹고 살아?”
내가 용돈 주면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냥 웃었다.
귤밭과 소 두 마리는 엄마 아빠의 노후 대비용이었다. 엄마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소 밥 주고 밭에 가서 밭일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지금 자리를 잡아두면 나중에 더 늙어서 퇴직하고 좋은 일거리가 될 거로 생각했다.
우리 집 소들이 몇 년간 새끼도 잘 낳고, 풀도 잘 먹던 어느 날, 옆집에서 공사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살던 집이었는데 딸이 사위와 자식을 데리고 함께 살려고 왔다.
건물이 완성되고 보니 펜션이었다. 숙박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옆집 아줌마는 우리 집에 민원을 넣었다. 소 울음소리 때문에 손님이 잠을 못 잔다, 소똥 냄새 때문에 손님이 안 온다며 화를 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게 딱 이 상황이었다. 옆집에 할아버지 할머니만 살 때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축사 짓는다고 허락도 받았고, 우리 부모님은 그 집 어르신들에게 음식도 드리며 깍듯이 대했다. 오며 가며 잘 지냈다. 소가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길 따라 조금만 걸으면 다른 축사가 나오는 동네였다.
하루는 아빠가 장작을 나르는데 아줌마가 나타났다. 아빠에게 호통을 쳤다. 소들이 왜 이렇게 우냐고 성질을 부리는데 아빠는 죄송하다고만 했다. 나는 그때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었는데 창문 넘어 들려오는 소리에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 집 소들이 아줌마보다 몇 년을 먼저 여기서 살았는지 아냐고, 축사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 옆에 펜션 지은 것이 우리 탓이냐고. 그릇을 닦던 손에 힘을 줄 뿐,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자 나는 아빠한테 뭐라고 했다. 왜 저 아줌마 말 듣고만 있느냐고. 뭐라고 좀 하라고. 저 집은 주차할 때도 우리 집 앞에다 하지 않느냐고. 왜 우리는 맨날 양보만 하냐고.
사실 나도 속으로는 이해했다. 좁은 시골 사회에서 얼굴 붉히는 일 생기면 좋을 게 없었다. 생각해 보면 소들이 발정기라서 많이 우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지난번에도 억지 부리는 동네 할아버지와 언쟁하여 아빠가 대신 사과한 적이 있었다. 아빠는 늘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혔다.
엄마가 암으로 쓰러지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소 두 마리는 팔아버렸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밥을 못 주게 될 상황이 생겼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도 소는 처분할 계획이었다. 이웃과의 분쟁에 엄마는 힘들어했다.
금귤밭은 아직 남아있다. 나는 아빠에게 어디 다니지 말고 엄마 옆에만 붙어있으라고 하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빨리 밭에 가 보라고 한다. 한때는 엄마 머릿속에 금귤이 가득해서 시기마다 해야 하는 밭일을 하지 못하면 불안해하였다. 이때는 비료를 뿌려야 하고, 저때는 김매야 하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해서 엄마 눈에는 긴급한 일이 너무 많았다. 옆에 없어도 되니 아빠에게 밭에 가라고 했다.
심지어 직접 가기도 했다. 나는 화를 냈다. 아픈 사람이 왜 자꾸 일을 하느냐고, 집에서 걷기 운동하고 쉬라고. 엄마도 화를 냈다. 할 건 해야지 어떡하냐고, 아빠 혼자 어떻게 다 하냐고. 그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밭에 가서 아빠를 도왔다.
아빠도 점점 몸이 약해지는 게 보였다. 속상했다. 우리 집 부모님은 다들 왜 이렇게 말랐는지.
아빠는 정년이 되어 퇴직하기 이전에 엄마를 간호하겠다고 사직했다.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 귤밭 없었으면 기댈 언덕이 없었다. 아들이 주는 용돈보다 귤밭에서 더 수익이 높았다. 내가 분발하여 부모님 말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데, 녹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