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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Oct 21. 2023

아들의 김치

 퇴원하는 엄마를 데리러 갔다. 병실 내 엄마 자리는 어수선했다. 가져갈 것은 미리 챙겨놓으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는데 가방 밖으로 삐져나온 짐이 볼썽사나웠다.

 “이래서 어떻게 가!”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엄마는, 준비 다 했는데 뭘 안 챙겼느냐고 맞섰다. 나는 이렇게 짐이 많으면 비행기 못 탄다고 과장을 담아 몰아붙였다.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엄마는 아픈 사람인데. 내가 어렸을 때 엄마도 답답한 거 다 참으면서 나를 키웠는데 나는 왜 이런 것도 이해 못 하는지. 후회와 짜증이 옹졸한 그릇 안에서 뒤섞였다.

 엄마 가방에는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비누가 있었고, 작은 구둣주걱과 구겨진 냅킨, 일회용 물티슈도 있었다.

 “내가 이런 거 버리라고 했잖아요.”

 엄마 대신 불필요한 물품을 꺼내려니까 엄마 기분이 상했다.

 “아이구, 놔둬. 엄마가 다 쓰는 거야.”

 빛바랜 검은색에 앞주머니가 하나 달린 엄마의 가방. 은색 지퍼 손잡이는 만화 캐릭터 모양이었다. 귀여운 손잡이에 비해 가방 색은 칙칙하여 조화롭지 않았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아프기 전부터 오래 들고 다닌 가방이었다. 아마 동생이 학생 때 쓰던 걸 엄마가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엄마가 쓰는 트렁크도 동생이 쓰던 것이라 비밀번호가 동생 생일이다. 그 안은 항상 고무줄, 동전, 볼펜 등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칫솔은 왜 2개씩 있는지. 병원 서류를 잔뜩 먹어 뚱뚱해진 투명 파일도 오랜 거주자다.

 괜히 내가 정리해서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던 게 떠올랐다. 엄마는 엄마의 방식이 있었다. 익숙한 모양이 물건 찾기 편하다고 했다.


 저번에는 지팡이를 짚고 겨우 택시를 탔는데, 이번에는 지팡이 없이도 잘 걸었다. 나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 엄마 손을 잡았다. 택시를 타자니까 지하철이 더 빠르다고 지하철을 탔다. 엄마 먼저 자리에 앉혔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엄마를 내려보았다. 흔들리는 사람들 속에서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엄마는 내게 들고 있는 짐을 달라고 했지만 나는 힘이 세서 괜찮다고 했다. 자리가 나서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 아프고 나서 손잡는 게 익숙해졌다. 화를 내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았는데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엄마 몸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희망은 항상 고통 뒤를 따라간다. 예전에는 그것이 참 고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안다. 작은 희망도 감사하다. 엄마는 정신력이 강해서 어둠 속에서도 자그만 빛을 따라 잘 걷고 있다.

 보호자도 함께 강해져야 하는데 나는 아직 모자라다. 부족함을 알아도 더하는 것이 어색하다.


 엄마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 전부터 잇몸이 안 좋아져서 틀니를 했다. 틀니를 해도 씹는 힘이 약해서 조금만 단단해도 드시지 못한다. 염소탕 하는 집이 있는데 고기가 연하고 건강한 맛이라고 좋아하셨다. 나는 종종 퇴근 후 그곳에 들러 염소탕을 포장해갔다. 3인분 포장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 먹었다.

 동생은 라면부터 잡채까지 모든 면을 좋아하는데 이는 엄마의 기호를 닮았다. 엄마는 동네에 있는 메밀국수 집을 좋아했다. 아프고 나서 음식을 가려먹었는데, 내가 쉬는 날에 한 번씩 “메밀국수 먹을까.” 물었다. 나는 5분을 운전해서 메밀 온면 하나, 메밀 비빔면 하나를 포장해 왔다. 나는 특별히 면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엄마와 함께 먹는 메밀면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나는 미각이 잘 발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편식쟁이에다가 기호랄 것도 없었다. 싱거운 게 몸에 좋다고 하여 자극적이지 않은 맛을 고르는 정도였다. 학교나 군대에서 남들 맛없다고 화를 내는 음식도 군말 없이 잘 먹었다.

 이렇게 맛을 모르니 자연스럽게 요리도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자주 요리하길 바랐다.

 “나중에 결혼하면 네가 밥 차리고 다 해야 되는 거야.”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가 전화기 너머로 난데없는 소리를 했다.

 “김장 한번 해 볼래?”

 계란후라이도 잘 안 하는 나에게 김장이라니. 엄마의 터무니없는 말에 어떤 힘이 들어있던 걸까. 군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대신 엄마가 영상통화로 하나하나 알려줘야 해”

 그렇게 김치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선 마트에 가서 배추를 골랐다. 김장철이 조금 지났는지 좋은 배추가 안 보였다. 배추를 처음 사보는 내가 봐도 안 좋은 것만 있어서 다른 마트로 갔다.

 “엄마, 이런 거라도 사?”

 병원에 있는 엄마 허락을 맡고 그나마 괜찮은 걸로 골랐다. 큰 대야를 씻어서 소금을 풀고 배추를 담갔다. 내일까지 기다리면 되는데 중간에 한 번 뒤집어줘야 했다. 엄마가 말했다.

 “잘했네, 절반 한 거야.”

 다음 날 아침부터 다시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김장하는 법을 읽어두어서 계량컵이 필요했는데 엄마는 그냥 감으로 하면 된다고 했다. 찹쌀을 물에 풀고 끓여서 죽처럼 만들어 믹서기에 갈았다. 무채를 썰어서 소금에 절이는데 무채는 조금만 하라고 했다. 고춧가루, 마늘, 생강, 멸치액젓과 새우젓, 매실액, 쪽파를 넣었다. 대파는 하얀 줄기 있는 쪽을 넣으라고 했다. 소를 버무렸다.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계속했다. 엄마는 걸핏하면 전화를 안 받았다. 의사소통하는 게 힘들었다.

 “화장실 갔다 와서 못 받았어.”, “이거 왜 화면이 안 나오니?”, “소리가 잘 안 들려.”

 나는 점점 답답해졌다. 불을 쓰지도 않았는데 뜨거워졌다. 요리는 화를 삭이는 수련 같았다.

 “일단 내가 알아서 해 볼게요.”

 그러다 막히면 전화하고 끊고, 잠시 후 다시 전화했다. 엄마의 설명은 암호 같아서 해석하는데 어려웠다. 수련은 실패했다. 두 번 다시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와 나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배춧잎 사이사이에 속을 버무리고 한 포기를 완성했다. 화면 속 엄마가 한 입 먹고 간을 보라고 했다. 조금 짜야 좋다고 했다. 싱거우면 시간 지났을 때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배춧잎이 떨어진 게 있으면 버리지 말고 씻어서 김치통 맨 위에 덮고 소금을 조금 뿌리라고 했다. 마지막 김치를 쌓고 뚜껑을 닫았다. 배추 열 포기를 모두 담갔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김치는 먹을만했다. 감흥은 없었지만. 나중에 엄마가 먹어보니 양념이 안 무쳐진 것도 많았다고. 그래도 잘했다고, 이제 장가가도 되겠다고 했다.

 김장김치 다 먹을 때까지 엄마랑 이야기 많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재작년 일이다. 어디 가서 김장해봤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김장하는 법이 기억에서 휘발되어 버렸다. 그래도 한번 해 본 것과 안 해 본 것은 다르다고, 엄마 설명을 얼추 알아들을 정도는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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