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도착하니 동생이 마중 나왔다. 하얀색 다마스를 타고 왔다. 캠핑 다닌다고 중고로 산 조그마한 차다. 세게 달리면 붕 뜰 것 같은 왜소한 몸집으로 우리 셋에 온갖 짐까지 업고 가는 것이 기특했다. 액셀이 부드럽지 못해 기어를 바꾸면 덜컹덜컹 반항하는 게 왠지 모르게 동생과 닮은 녀석이었다. 동생은 엄마 드시라고 공항 오기 전에 추어탕을 포장해 왔다. 기특한 것도 다마스를 닮았다.
집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다음 날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종아리에 붓기가 있었다. 엄마는 걸으면 다리가 아프고, 안 걸으면 답답하다고 했다.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살짝만 눌러도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누워서 다리 아래 베개를 두어 다리가 높이 오게 했다. 부모님은 불편하다고 침대를 쓰지 않는다. TV도 아직 조그마한 브라운관을 쓴다. 뒤통수가 튀어나온 TV는 박물관이 아니면 우리 집에서만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잘 안 사신다. TV 사드린다고 해도 필요 없다 하시고.
다음날 나는 새벽에 나왔다. 방문을 슬쩍 열어보니 엄마는 아기처럼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걷어찬 흔적이 보였다. 그대로 나왔는데 이불을 덮어줄 걸 그랬다. 아침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내리니 잘 갔느냐고 전화가 왔다. 잘 왔다고, 엄마도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어려서 가졌던 어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학생 되면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거 내 전공이야.’라는 말도 있듯이 대학 가서 전공 공부하면 그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다. 마음이 넓어져서 유치한 일로 싸우면서 감정 상할 일 없을 줄 알았다.
뭐 하나 맞는 게 없는 이런 인식 때문에 엄마가 피해를 보았다. 어른이면 응당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여유롭게 유턴할 수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장롱면허’ 소지자였던 엄마는 제주 오면서 운전을 시작했다. 작은이모가 서울에서 타던 자주색 아벨라 차량을 받아서 제주로 가져왔다.
쪼끄마한 시절의 우리 남매는 운전면허증이 장롱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운전 잘 못하는 엄마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실수할 때마다 핀잔을 주었다. 왜 그리로 갔어, 위험했잖아, 엄마는 운전을 왜 이렇게 못 해. 일반적으로 엄마는 웃어넘겼다. 잘만 하는구만, 하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하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한 번씩 삐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자동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정비소에 갔다. 정비사가 여기저기 살펴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엄마는 시내에서 넘어오는 길에 계속 소리가 난다고 했다. 알고 보니 도로에 새겨진 ‘미끄럼 방지 홈’에서 나는 소리였다.
몇 년 지나서는 운전을 잘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운전할 때 나는 뒷자리에 앉는 걸 좋아했다. 사실은 눕는 걸 좋아했다. 뒷자리에 누워서 창문 밖을 거꾸로 보는 걸 좋아했다. 가로수가 휙휙 지나갔다. 하늘과 구름, 전봇대와 전선을 보았다. 파란 배경을 가르는 까만 선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집에 도착할 때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엄마는 보통 나를 몇 번 부르다가 먼저 들어갔다. 나는 일어나기 싫어서 버티다가 엄마가 먼저 들어가면 조금 이따 따라 들어갔다.
나는 성인이 되어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다. 필기는 손쉽게 붙었다. 기능시험과 도로주행 시험이 남았는데, 당시 학원 다니려면 백만 원 든다는 소리를 들어서 학원을 안 다니기로 했다. 엄마를 옆자리에 앉히고 인적 없는 공터에서 운전 연습을 했다. 시험장 가서 출발했는데 첫 번째 언덕길에서 시동이 꺼져 탈락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S자 코스에서 바퀴가 인도로 넘어가 탈락했다. 결국 기능시험 교육해주는 학원을 등록했다. 기능시험에는 공식이 다 있다고 했다. 공식대로 했더니 시험을 통과했다.
도로주행은 정말 학원 없이 돈 아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벨라 뒷유리에 ‘도로주행연습중’ 스티커 붙이고 엄마랑 같이 열심히 달렸다. 자신 있게 시험장으로 갔다. 그리고 탈락, 또 탈락. 세 번 만에 붙었다. 시험비가 꽤 많이 나왔다.
대학교 등교할 때 엄마 차를 내가 타고 다녔다. 내가 군대 가고 난 뒤로는 다시 엄마가 타고 다녔다. 그 뒤로도 한참을 더 타다가 사고가 나서 폐차했다. 다행히 운전사였던 엄마는 다친 곳이 없었다. 20년 가까이 우리 가족과 함께한 자주색 아벨라는 내가 없을 때 엄마 안 다치게 자기 혼자 조용히 떠났다.
아벨라가 떠난 뒤로 우리 집에 승용차는 없었다. 파란색 트럭만 한 대 있었다. 아빠는 그 차로 출퇴근하고, 엄마랑 장 보러 다니고, 밭일 갔다. 아벨라보다 훨씬 늦게 우리 집에 합류했지만, 묵묵히 제 역할을 했다.
엄마 아프고 나서 동생은 중고차를 샀다. 여기저기 엄청 발품을 팔아 회색 아반떼를 구매했다. 엄마가 서울 갈 일이 잦으니 제주공항 왕복할 때 데려다 줄 용도라고 했다. 그런데 동생은 몇 번 타지도 않고, 나한테 사 가라고 했다. 아반떼 사느라고 돈을 다 써버렸더니 밥 사 먹을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경차 살 거라고 거절했지만 동생은 끈질겼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받아왔다. 그것이 내 첫 차가 되었다. 중고지만 상당히 깨끗했고 주행거리도 길지 않았다. 출퇴근할 때 잘 타고 다녔다. 엄마 병원 갈 때도 유용하게 썼다. 무엇보다 집에 승용차가 하나 있으니 나들이 가기가 좋았다.
지금은 내가 제주에서 육지로 이사하면서 아반떼도 함께 왔다. 여러모로 엄마의 아벨라와 닮은 것 같아서 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