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눈을 떠 보니 입대 4일 차 훈련병이었다. 논산훈련소는 설익은 군인들로 북적북적했고 우리를 통제하는 교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새내기들의 약간은 붕 떠 있는 듯한 정신세계가 켜켜이 쌓여 그곳의 공기를 채우는 것 같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심호흡을 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신경에, 팔을 촉수처럼 내밀고 나를 방어하려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되곤 했다.
성탄절이란 단어도 그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쪽에는 침울함 속에서 욕지거리를 뱉는 이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시끌시끌한 수다에 욕을 소금 치듯 섞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도 욕이 들렸다. 종교행사 간다고 해서 줄을 섰는데 내가 속한 줄은 열외당했다. 보급창고 정리한다고 그날 늦은 저녁까지 창고에서 먼지를 마셨다. 아기 예수의 축복이 우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설날에는 훈련소에 국방부 장관이 왔다. 병사들과 함께 떡국을 먹기 위해서였다. 장관 옆에서 밥을 먹은 덕에 휴가받은 병사들이 부러웠다.
자대로 가기 전 잠시 머물던 임시부대에서 자살 방지 교육을 여러 차례 들었다. 내 눈에는 괴롭히는 사람보다 당하는 사람의 자세를 더 신경 쓰는 모양새로 비쳤다. 훈련소에서 인간의 추악함에 대해 깊이 생각한 탓인지 이때쯤에는 삐딱한 눈이 되어 있었다. 그날의 강사는 스님이었다.
‘盲龜浮木’
칠판에 한자를 쓰고는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뜻을 아는 이가 있는지 물었다.
‘맹구부목’. 눈먼 거북이와 뗏목이라는 뜻이라 했다. 옛날에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눈먼 거북이가 있었다. 천 년에 한 번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하필이면 망망대해에서 부유하는 뗏목이 있는 곳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 뗏목은 가운데가 도넛처럼 비어있는 것이라 거북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고 했다. 끝없이 넓은 바다를 떠다니는 뗏목과 천 년에 한 번 올라오는 거북이가 그 한 점에서 만날 만큼 희박한 확률을 ‘맹구부목’이라 이른다는 스님의 말씀이었다. 우리 모두의 인연이 이와 같으니 한 명 한 명 만나는 것이 다 운명이고 필연이다, 따라서 부대에 들어가면 사람을 사랑하라고 설파하셨다.
마침내 도착한 자대에서 나는 전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한 지붕 아래 사는 성격 안 좋은 이웃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나의 최선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불쌍한 이등병에게 찾아온 첫 면회자는 작은이모네였다. 이모 부부와 사촌 동생 둘. 초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의 응원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몇 달 후에 이모네 가족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엄마와 동생도 함께였다. 제주도 멀리서 가족이 왔다고 부대에서 특별히 외출을 보내주었다. 그날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놀러 간 빡빡이 군인과 엄마. 앳된 엄마와 앳된 나는 서로의 안녕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날의 사명을 다 이루어서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이었다.
가족과의 만남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군 생활을 하면서 눈먼 거북이와 뗏목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숨을 쉬기 위해 천년 만에 나오려는데 까딱 잘못하면 내 머리를 톡 칠 수도 있는 뗏목. 미운 사람에게 대입해보니, 이건 인연이라기보다 가혹행위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바다 위 나무 같은, 내 인생의 귀한 손님이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마침내 첫 휴가를 받아 제주로 왔을 때 우리 집은 이사한 상태였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촌의 단독주택으로 갔다. 중요한 점은 전세에서 자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결혼 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가지게 되었다.
집 왼편으로는 누군가의 귤밭이 있었다. 돌담으로 경계가 나 있었다. 뒤쪽 길 너머로는 이웃의 비닐하우스가 넓게 있었다. 시내에서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에 네 대 있었고, 면 내를 돌아다니는 작은 버스가 그보다 조금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벚꽃길의 초입이라 봄이 되면 벚꽃축제 보러 오는 관광객으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그 시기를 제외하면 조용한 동네였다.
집 앞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창고 하나가 집과 붙어있었다. 뒷마당은 꽤 넓은 곳이어서 평상 하나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등이 분위기 있게 서 있었다. 부모님은 마당에 녹차 나무를 몇 그루 심었다. 귤나무도 심었다. 블루베리 나무도 심었다. 그 나무들은 결실을 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결실이었다.
내가 이등병일 때 내부 공사를 새로 했다고 하셨다. 예전에 아빠와 함께 일했던 목수 친구에게 맡겨서 목재로 안벽과 천장을 바꾸었다. 천장 중앙에는 샹들리에 흉내를 낸 것 같은 소심한 조명이 주황빛으로 거실을 밝혔다. 깔끔하고 분위기 좋은 집이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할머니는 매년 오르는 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세 자매와 함께 이리저리 집을 옮겼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일해서 버는 돈을 다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가 가져간 돈은 전부 생활비로 사라졌다. 엄마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돈을 붙잡으려 적금을 들었다. 할머니께 이 돈만은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 적금 만료 후 목돈이 생겼지만, 할머니와 동생들은 또다시 이사 가야 했고 엄마가 모은 목돈은 다시 집세로 들어갔다.
어른이 된 엄마는 아빠와 만나 결혼했다. 둘은 단돈 얼마를 들고 서울의 한 부동산에 찾아갔다. 그런데 그 돈으로는 얻을 수 있는 집이 없다며 부동산 아주머니가 본인 집의 방 한 칸을 얼마에 빌려주었다. 남의 집 방 한 칸에 세 들어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부부가 이제 처음으로 집이 생겼다. 마침내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군대에 있을 때 왜 거북이 이야기를 자꾸 되새겼는지 모르겠다. 내 눈에 우리 부모님은 거북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방어하고 고개 숙이고 낮은 자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처음은 깊고 추운 곳이었지만 이제 따뜻한 나무집을 만났다. 이 집이 부모님의 뗏목 같았다.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삶의 태도였다. 사자성어 속 거북이는 천 년 만에 수면으로 올라왔다는데 천 년 동안 열심히 덕을 쌓았나 보다.
내 사전에 ‘맹구부목’은 두 가지 의미로 적혀 있다. 첫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것. 둘째, 노력하고 인내하면 복이 따른다는 것. 엄마 아빠는 바다 위에 나무집을 세웠고 나는 그걸 보며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