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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냉장고

추억 1

by wisdom

엄마가 돌아가신 후 친정집 정리는 내 몫이었다.

대신해 줄 사람도 없었고 누가 대신해 줄 일도 아니었다.

분명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미룰 수만 있으면 미루고,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엄마를 떠나보낸 것도 인정하기 힘든 상황에 엄마의 남은 흔적까지도 지워야 하는 그 작업은 나에게 너무 힘든 숙제였다.

수시로 들락대던 친정이었는데 엄마 없는 친정집은 왜 이리 낯설기만 한지.

심지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를 때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친정집 정리를 끝내야 내 마음도 정리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정집에는 아빠 혼자 지내고 계셨기에 냉장고 정리가 우선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냉장고 정리를 하고 와야지'

큰맘 먹고 친정에 간 나는 먼저 냉장실 문을 열었다.

마늘장아찌, 매실장아찌, 김장아찌, 엄마가 직접 만든 쨈, 된장, 고추장...

엄마가 집을 비운 지 두 달도 넘었기에 냉장고 속 음식들을 싹 다 버릴 생각으로 문을 열었는데, 각종 저장 음식들을 발견한 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너무 좋았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엄마의 손길이 담긴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엄마의 음식을 좀 더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저장 음식 외에 상한 음식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이번에는 냉동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검은색, 흰색의 알 수 없는 봉지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만져만 봐서는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일일이 꺼내 확인하는 수밖에.

떡, 생선, 고기, 얼린 마늘, 각종 가루들...

정체불명의 가루들이 나를 난감하게 했다.

진짜 이게 어떤 가루들인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뭐든 툭하면 엄마에게 물었던 나였는데, 이제 대답해 줄 엄마가 곁에 없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겠다며 무턱대고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 버리기 싫었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다.

엄마의 정성과 생각까지도 함께 버려지는 것 같아서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냉동실속 음식들을 다 꺼내 봉지를 벗겨 지퍼백에 옮겨 담았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맛까지 보며 추정을 해서 지퍼백에 이름을 썼다.

백설기, 떡국떡, 콩, 쌀가루, 묵가루, 표고가루, 새우가루...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친정에서 챙겨온 것들을 한 보따리 꺼내놨다.

전에는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이제는 내가 알아서 챙겨 와야 한다.

꺼내놓은 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생선을 굽고 된장에 표고가루, 새우가루를 넣어 된장찌개를 끓이고 각종 장아찌들을 덜어내어 한 상을 차렸다.

엄마를 느끼고 싶어서 차린 밥상.

이 밥상의 주인공은 나일까? 엄마일까?

한동안은 친정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밥상을 차리며 엄마를 추억했다.

귀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아껴먹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떠난 지 11년이 지난 지금.

이제 엄마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은 없지만, 그 반찬통은 내용물이 바뀌어 우리 집 냉장고에 남아있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친근한 반찬통과 반찬통 위에 적혀있는 엄마의 필체.


그리워만 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추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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