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명절 나기

by wisdom

"너 어디니? 지금 좀 빨리 와라. 엄마 힘들어 죽겠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짜증 섞인 어머님의 목소리.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기타 동아리 모임 후 멤버들과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고 있던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짧은 전화 통화 후 먼저 가봐야겠다는 나에게 다들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다음 주에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나는 시댁으로 갔다.

시댁에 도착해보니 고기, 생선, 계란, 밀가루 등으로 어질러진 부엌은 명절을 방불케 했다.

"곧 설날이잖냐. 아빠가 너 부르지 말고 우리 둘이 하자고 했는데 힘들어서 안되겠더라. 그래서 부른 거야. 엄마 시간 될 때 미리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려고"

설날이 2주나 남았는데 설날 음식을 미리 만들고 계셨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매년 명절을 시댁에서 보내는 나는.

명절 전날 어머님과 명절 음식을 함께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은 몇 가지씩 꼭 해가지고 갔다.

모이는 식구라 봤자 우리 네 식구, 시부모님, 시동생 이렇게 7명이기에 명절 음식이라 해도 준비할 양도 많지 않고, 명절 전날 하루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음식 준비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큰일이나 난 듯 빨리 오라고 하셨지만 전 부치기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명절이 코앞에 닥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까지 불러대는 이런 상황을 만드신 어머님이 이해가 안 갔다.

집에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어머님 월차라 쉬시는 김에 전을 미리 부쳐놓고 명절의 부담을 덜고 싶으셨나?'

'아니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나에게 심술을 부리신걸 거야.'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도 어머님 마음 가는 대로 하신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설날을 2주씩이나 앞두고 이러시는 건 나에게 심술을 부리시는 거라고 밖에 생각이 안됐다.

아무리 딸같이 편히 대하는 며느리라지만 이러시는 건...

(다행스럽게도 이런 황당한 호출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난 명절.

여느 때처럼 음식 몇 가지를 해가지고 명절 전날 시댁에 갔다.

가자마자 당연히 전을 부칠 거라 생각하며 부엌에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님께서 새벽부터 일어나 전을 다 부쳐놓으셨던 것이다.

이게 뭔 일일까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어머님은

"너희 힘들까봐 엄마가 미리 다 해놨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할거 없으니 그냥 쉬어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너희 힘들까봐...

너가 아니라 너희...

전 동서가 들어왔는데 어머님은 내 눈치는 안 보셔도 동서 눈치는 엄청 보셨다.

새 식구니까 아무래도 10년 넘게 본 며느리랑은 다르시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어머님에게 동서는 항상 어렵고 손님 같은 존재였다.

어머님 말씀에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순종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혹독하셨던 어머님이, 시집와서부터 할 말 다하는 동서에게는 사소한 부탁 하나도 못하시는 어머님이셨다.

어머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동서와 차별받는 느낌에 항상 속상했다.

'나도 동서처럼 처음부터 세게 나가볼걸 그랬나?'

'이제부터라도 할 말 좀 해볼까?'

실천하지도 못할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제 동서가 들어온지도 6년째.

큰며느리에게만 일을 시키기 눈치 보이셨는지 아니면 혼자 음식 장만하시는 게 힘드셨는지 몇 번의 명절을 거듭하며 불필요한 음식이나 일들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내가 필수로 해가던 음식 가짓수도 줄어들었다.

이제 명절 동안 종일 기름 냄새를 맡으며 부엌에 있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여전히 내 몫의 할 일은 남아있다.

올해도 역시 "너희 힘들까 봐 엄마가 미리 다 해놨다" 말씀하시며 덧붙이시는 말.

"파전은 네가 잘하니까 파전만 부치고 쉬어라."

그 말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반갑기도 했다.

명절 때마다 일을 도맡아 했던 며느리에게는 쇼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는 것보다 부엌에 서서 파전이라도 부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수십 장의 파전을 부치며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부엌일을 마치고 나오니 어머님은 쇼파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새벽부터 혼자 동동거리셨을 테니 피곤하기도 하셨겠지 싶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그까짓 전이 뭐라고...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직장에 다니시며 자식들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고 큰소리 뻥뻥 치시는 어머님인데, 새벽부터 혼자 일하시고 다리도 못 편 채 쭈그리고 주무시는 모습이 갑자기 측은하게 보였다.

하지만 결혼 18년 차 며느리는 이제 좀 감정에 무뎌지고 독해졌나 보다.

이것도 어머님 나름의 명절을 보내는 방식일 거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비집고 나오는 짠한 마음을 눌러 집어넣었다.


아들만 둘인 나도 언젠가 며느리를 맞이할 텐데

내가 중심을 잘 지키며 시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어른 노릇하기 힘든 세상, 특히 시어머니 노릇은 더더욱 하기 힘든 세상.

시어머니, 며느리는 물론 식구 모두가 즐거운 명절 나기는 어떤 것일까?

딱히 답이 없는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며 피식 웃음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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