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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짧으면 행복하다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14

by 풀꽃


작은 복숭아빛 혈압약, 아침마다 먹어야 하는 혈압약 한 알 톡, 따서 먹으려다, 잇몸약도 같이 먹으려다 그만 손가락 사이로 놓쳤다. 나무 마루에 부딪히는 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어디에도 없다. 뭐, 이러다가 오늘 저녁쯤, 아니면 며칠 후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겠지. 다음 병원 가는 날 꼭 맞춰 예약을 잡아주신 의사 선생님 덕분에 한 알을 잃어버리면 어느 한 날은 곤란해질 수 있다. 물론 혈압을 못 잡아 뒷목 잡고 쓰러질 만큼 중증은 아니니 하루 거른다고 뭔 일 나진 않겠지만.

작년 이맘때 문득 허청하니 어지럼증이 생겨 불안해졌다. 음, 열아홉 살부터 줄창 먹어대던 술이 드디어 나를 머리부터 공략하는구나. 증상은 영양실조나 저혈압 비슷하지만 이래 봬도 입은 짧으나마 시시때때로 열심히 뭔가를 먹어대며 청바지가 아니면 절대 가려지지 않는 나의 똥배로 보아 비축 영양소도 부족할 리 없다.

술은 나의 존재론

직장에 가기 싫은 걸까? 여길 그만두고 혈압이 정상이 되었다던 전동료 말대로 직장 스트레스일까? 그 모든 시답잖은 원인을 제쳐두고 알차게 마셔대는 맥주가 가장 두려웠다. 그렇다고 고작 하루 한두 캔, 내 삶의 낙, 모든 창조적 발상과 예술적 영감 및 우주적 존재 각성의 윤활유인 맥주를 끊을 수는 없는데... 만약 어지러워서 왔다고 고백했을 때 의사 선생님이 “술만 끊으시면 건강해지십니다.”하는 하나마나한 말씀을 하면 어쩌나 망설여진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전, 그때도 두통과 어지럼증 때문에 한의원에 갔을 때, 벽에 걸린 모태 천주교 신자임을 증명하는 원장님의 배냇저고리와 천주교식 십자가 묵주를 경건히 올려다보며 고해성사를 하듯 “제가 매일 술을 마셔서 이런 걸까요?” 자복했을 때, 천천히 도리도리를 하며 “술을 안 마시고 살 수는 없죠.”라고 말씀해 주신 한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죄책감을 씻어주던 한의사 선생님

그 한마디 말씀은 병의 치료 여부를 떠나 영혼의 죄책감을 씻어주었다. 그래, 노화와 투병은 자연의 이치이고 부처님도 어쩌지 못한 삶의 고뇌일 뿐, 음주 운전과 주사, 음주 직무를 행한 것도 아닌데 저녁마다 맥주 한 병씩 마셨다고 죄책감까지 느끼며 살 필요는 없는 것. 침과 한약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건강한 음주 생활을 하겠노라 다짐했었지.

그러나 이번에 찾아간 가정의학과 의사 쌤은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우울증 검사를 거쳐 아주 약한 혈압약을 처방해 주셨다. 병원 로비의 기계 측정부터 진료실 안 수동 혈압계까지 나의 혈압은 160에서 180을 널뛰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나도 드디어 남들 다 가는 평생 혈압약 시대를 열었다.

나의 의사 쌤은 “요즘 스트레스받는 거 있으셨나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트레스야 늘 있죠, 뭐 조금..”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이 선생님의 촉에 경의를 표한다. 물론 나보다 훨씬 연세 많은 노인 환자들이 대부분인 가정의학과에서, 원인이 불명한 각종 증상은 대개 노년 우울감에서 비롯될 것이었다. 의사 쌤은 얼마나 많은 그런 사례들을 보았겠는가. 아닌 척하고 앉아 있는 이 중년 여인은 갱년기 우울감에 원인 모를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러나 “너 우울하니?”라고 물었을 때 그 직화직설(直話直說)의 무게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의사 쌤은 에둘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우울하냐고 묻지 않던 의사

“좀 약한 혈압약 처방해 드릴게요. 긴장감 완화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헐, 난 예민한 신경으로 늦게까지 잠 못 들어 뒤척인다는 말도, 지난해 가을 급격한 우울감을 허접한 시로 달랬다는 말도, 그리고 심지어 새로 바뀐 정치적 상황 때문에 국가적 우울감까지 온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늘......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인가 아님 정말 혈압약 덕분인가, 약을 먹은 후 자다가 부정맥에 놀라 깨어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던 일, 잘 안 풀리는 일들을 최대한 가장 나쁜 상황으로 상상하던 일들이 사라졌다. 나의 신경과 사고력을 둥근 원, 혹은 한 없이 부풀어가는 풍선에 비유하자면 그 테두리의 반경이 매우 짧아졌다고나 할까.


생각이 짧은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는 흔히 ‘넌 왜 그리 생각이 짧으니?’라고 누군가를 면박 주곤 하지만 그 말이 참 좋은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전생에 통틀어(entire my life – 미드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인데 12살 먹은 아이도 이런 표현을 쓰더라. 언젠가 이 표현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스페인어로는 en toda mi vida, 인데 그 언어권에서도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지는 모르겠다. 스페인어에 살다 오신 분들, 답해주시라.) 처음 든다.


생각이 짧은 사람은 별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 예민한 사람들은 생각이 자꾸 뻗어나가다 못해 산으로 간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까지 상상하느라 걱정이 태산이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땅이 꺼지지 않을까, 기우(杞憂)는 오늘날 같으면 신경안정제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었던 병인 거다.

마침 막 혈압약을 복용하기 시작하고 아침마다 혈압을 재면서 130 – 80 언저리에서 뭐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생각을 할 무렵, 요즘 유행하는 그, 설렌 건가 싶었는데 부정맥이라는 농담처럼 부정맥이 없어지니 불안감도 없어지는 증상에 신기해할 무렵,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다.


전쟁을 겪은 병사들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다(왜 안 그렇겠는가). 그들 중 혈압이 높은 환자에게(혈압과 스트레스가 연동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혈압약을 처방했단다. 그랬더니 그들의 PTSD 증상이 완화되더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생각하지만 러닝 머신을 막 뛰게 한 후 보여준 이성의 사진에 자신의 감정이 움직였다고 생각한다는 심리검사처럼 전후는 헷갈리기도 하는 것이다. 혈관이 좁아져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고 불안해서 심장이 빨리 뛸 수도 있는 것이고.


하여간 나는 그리하여 당신도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혈압약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 안타까워하는 남편과 달리 “오, 이거 좋은데? 이런 효과가 있다면 평생 먹으란 대도 난 찬성일세.” 하면서 혈압약 예찬론을 펼친다.

나는 과학과 의학을 믿는다.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나를 위로해 주라. 식탁 밑에서 발견된 먼지 묻은 작은 혈압약, 까짓 거 물에 재빨리 씻어서 먹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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