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10
김선미의 <비스킷>과 나혜림의 <클로버>를 읽으며 새삼 생각했다. 한국에는 재미있게 읽으며 생각할 거리들을 만나는 좋은 청소년 소설이 엄청 많다!
질 좋은 청소년 소설이 많아지는 이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반짝하고 있지만 사실 이제 소설이 시장에서 거의 팔리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나마 청소년 소설이나 어린이 도서는 팔리고 있다. 부모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아이들에게는 책을 읽히고, 특히 학교는 많은 예산을 도서 구입에 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환경이 ‘좋은 청소년 소설’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문학적 본질에 대한 갈망은 갈망이고, 글로써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존의 소설가들도 청소년 소설을 써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듯싶다.
하지만 청소년 소설은 문학의 본질에서 빗겨 난 기생적이고 기형적인 장르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청소년 소설이야말로 쓰기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니까 그냥 좀 말이 안 되는 엉성한 플롯이어도 재미있게만 쓰면 읽히지 않을까? 절대로 아니다. 작가의 자의식 과잉, 너무 과한 주제 의식, 허접하게 재미만 추구한 책, 어설픈 청소년 문화 흉내 내기, 이런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선택되지 않는다. 그러니 작가들은 더 정교하고 문학적으로도 훌륭하면서 재미도 있는 소설을 쓰려 노력한다.
소녀가 주인공인 세상
안타깝게도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소녀들이다. 여자 청소년들이 책을 더 많이 읽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 중학생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남학생이 주인공이거나 남학생 입장에서 썼거나 남학생들이 즐겨 읽을 만한 소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안타깝다. 다른 모든 문화적 영역과 마찬가지로 독서와 도서의 시장에도 젊은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다.
<비스킷>의 주인공인 제성은 청각이 몹시 예민하다(그러고 보니 제목과 중의성이 있다. 비스킷의 바사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제성이 뿐이니까) 게다가 그에게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사람들, 즉 ‘비스킷’을 알아보는 초능력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초능력을 '과민함'으로 받아들여 정신과에 가둔다.
제성에게 사람의 존재감은 농도로 감지된다. 존재감이 약한 사람은 흐릿하게 보이다 못해 3단계를 지나면 바사삭, 부서져 사라져 버린단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은 그가 사라진 줄도 모른다는 것.
그래, 학교에도 그런 아이가 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아이. 교사들도 그런 아이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하지만 말썽꾸러기들과 씨름하느라 얌전하여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학생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담임을 할 때 매일 일기(교무수첩)에 그날 이름 부른 아이들을 적어 본 적이 있다. 한 반에 30명이 넘던 시절인데 놀랍게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써 나가다 보니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경악했다. 나는 정말 아이들과 친한 선생이라고 자부했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보다 못하는 것 투성이인 학생들 곁에 늘 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썽꾸러기들이나 개구쟁이들은 몰라도 못하는 것, 잘못하는 것 없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들은 나조차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도 비스킷이 될 순 있지만 누구도 비스킷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중에 있는 표현이다. 비스킷은 ‘존재감’ 그리고 존중받음에 대한 대유다.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가정에서 도외시되고 학대받는 아이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제성과, 제성이 덕분에 ‘비스킷’에서 벗어나 함께 학대받는 아이를 돕는 데 합류하는 친구들까지, 선한 영향력은 이렇게 세상을 구원한다.
비스킷을 보는 초능력자가 세상에 있을 리 없고 강력한 공권력과 진심을 가진 어른들조차 가정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을 구제할 수 없는 세상이다. 현실이 무력할수록 작가처럼 이렇게라도 그 아이들을 구해내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더 어릴 때, 더 망가지기 전에, 죽임을 당하기 전에, 더 맞기 전에, 더 학대받기 전에 그 작고 여린 몸을 구해낼 수만 있다면, 부서지기 전에, 바사삭 부서지기 전에...
<클로버> – 대가 없는 행운이 있을까?
악마가 유혹하기 딱 좋은 지독한 가난, 거기 놓인 한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악마가 자기 신분을 밝히고 거래를 하자고 덤비는데 미끼를 문다? 바보 아닌가? 나라면... 그깟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의연함이 내게 있는 듯 으스댔다. 하긴, <파우스트>를 처음 읽을 때가 고 2 땐가 그랬으니 세상을 온통 관념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성과 육신이 불일치하는 노인이라면 그런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 같다. 늙어가기 시작하니 조금은 알겠다. 나 같은 범인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은데 몸이 늙어가니 어쩌누, 싶은데 파우스트처럼 영민하고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성이 몹시도 아까워 악마와 거래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혜림의 <클로버>에도 자칭 자신이 파우스트와 거래했다고 하는 악마가 등장하는데, 이번에 거래하는 대상은 찢어지게 가난한 중학생 소년이다. ‘만약에’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악마와의 거래가 성사되는, 갖고 싶을 것이 너무나 많은 소년 정인. 할머니와 폐지를 줍고 악덕 사장이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해야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복지관에서 주는 햇반과 라면으로 끼니를 이어야 하는, 절대적 가난에 놓인 소년이다.
악마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정인에게 영혼을 팔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대상을 잘못 잡았다. 악마의 거래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 정신이 핍약한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정인은 건강한 아이다.
작가의 말빨에 현혹되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이토록 많은 플래그를 붙인 적은 없었다. 명문과 박학다식, 현란한 말솜씨에 드라마로 만들면 좋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런 글을 보면 역시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무나’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1인으로서). 청소년 소설들 품질이 엄청 높아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재미와 줄거리가 중심에 놓여 문체라든가 철학적 성찰이라든가 주제의식 면에서 심오한 것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미도 있으면서 뭔가 성숙한 느낌을 주는 청소년 소설을 만난 기분이다. 심지어 나는 기억에 남는 문구를 모아 노트북에 입력해 놓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나의 느낌 주석을 붙여 본다.
악마는 부잣집에도 찾아가지만 가난한 집에는 두 번 찾아간다 – 순정한 영혼으로 태어났으나 가난한 혹은 부족한 부모 탓에 불행해진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
인류 역사 3400년간 전쟁이 없었던 날은 268년, 고작 97820일뿐이었어. - 전쟁의 위험을 걱정하는 이 시대를 살며, 내가 살아온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악마가 휴가 갔던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감사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하다. 다시 전쟁의 시대를 물려줄 것인가? 내가 사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전쟁은 외면할 것인가?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 - 오, 이 반어법이라니. 이 상대성이라니!
악마에게 식욕은 없다. 식탐만 있을 뿐. - 잘 먹고 잘 사는 이 시대에 갈수록 사람들이 더욱 맛있는 것을 갈구하는 모순.
탐욕은 모든 등식을 부등식으로 만들거든. - 오!
정인은 재아의 손바닥 앞에 제 손을 펼쳤다. 패티를 데우다 생긴 화상, 폐지를 줍다가 노끈에 쓸린 자국이 있는 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과 돈을 버는 손은 묘하게도 닮았다. - 처지가 현격히 다른 두 아이가 우정의 교감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소돔에서 나는 사과는 겉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재의 맛만 난다고 함. - 지옥의 유황 냄새나는 꽃밭처럼, <기억전달자> 속 무채색의 디스토피아처럼, 맛과 향을 지닌 이 소소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
몸은 급하게 크는데 안쪽은 옹골차게 차오르질 못하고 비었는지, 정인은 눈동자가 깊고 말이 없는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그 휑한 안쪽에선 분명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급하게 철들며 포기해야 했을 욕심들이 소년 안에서 뭉근하게 숙성되었기에. 너무 일찍 밥값의 무게를 알아버린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은 소년의 영혼에 풍미를 더해 주었고, 소년이 곱씹어 삼킨 외로움은 근사한 고명이 되었다. - 정인을 악마의 ‘먹이’로 표현하는 대목. 배고픔이 아이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싶어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장면이기도 하다.
복지관에서는 오래된 박스 냄새가 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복지관 건물이 골판지로 지어진 것도 아닌데. - 세상이 함께 힘을 합쳐 가난한 아이를 도와도 어딘가 종이밥을 먹는 것처럼 허전하고 허청하다.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왜 인간은 불운에게만 묻는가? 행운에겐 ‘왜 나인가? 묻지 않으면서 –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 행운이 왔을 때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만약 그 모두가 신의 가호도 악마의 장난도 아닌 그저 우연이라면, 모든 우연에 대해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지옥은 죄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그럼 지상은? 여기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데?” - 악마는 이렇게, 얄밉지만 옳은 말을 한다.
“돈 낭비하는 방법도 진짜 다양하고 창의적이네요.”(호텔에서 악마와)
“산통 깨는 방법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것처럼” - 정인과 악마의 티키타카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 우와, 이거 시(詩) 아닌가?
집안 곳곳에 누군가 빨간색 색연필로 ‘오답’ 표시를 해놓은 것 같았다(호텔에서 돌아온 뒤 곰팡이, 뒤틀린 문, 깨진 타일을 가진 집을 보고 느낀 정인의 감정) - 인생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토록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가에게 경의를.
인생도 마찬가지고. 마냥 어두운 것 같아도, 그 밤이 지나고 햇빛이 비출 때 어떤 모습일지는 너희가 결정하는 거다 ; 정인의 국어 선생님의 말(소설 속에서 멋진 말들은 주로 국어샘들이 한다. 이힛! 나도 국어 선생인데?)
돌아서는데 찍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붙어 있던 운동화 갑피가 밑창에서 떨어진 거였다. 정인의 자존심도 기어코 찢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 심리학에서 ‘신체화’라는 표현을 쓴다. 마음의 아픔이 몸의 아픔으로 나타나는 것. 정인은 삶이 무너지는 장면을 아슬아슬했던 운동화가 찢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그럼에도 ‘괜찮다, 괜찮다...’ 읊조릴 수 있는 성숙한 아이다.
폭력은 비디오 게임, 전쟁은 뉴스 속보, 착취는 초콜릿, 생명 경시는 모피 코트, 환경오염은 아보카도와 스포츠 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 그렇게 악마와 손을 잡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
한 칸짜리 집에는 갈등을 넣어 둘 수납공간이 없다. 이런 격언이 있다니!!
공기 중에 ‘만약에’가 가득 차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정인의 머릿속에서 만약에는 풍성하게 포자를 터뜨렸다. -상념에 가득 찰 때 내 머릿속은.. 그랬구나, 곰팡이 포자가 퍼지듯, 그래서 잠도 못 들고 마음이 아팠던 거구나..
보호자 대기실 문을 나서려던 정인은 제가 걷어찬 슬리퍼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슬리퍼를 아줌마 쪽으로 다시 밀어주고는 나갔다. -그래, 정인이는 착한 아이라니까?
“만약에를 백 번 해도 네가 있어야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정인의 등을 감쌌다. - 이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자꾸 들려줘야 한다.
“저 미성년자예요. 면허 없어요.”
“그놈의 미성년자, 미성년자! 너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를 선결제로 한 삼십 년 당겨 쓴 사람 같은데.”
“철이 당겨서 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그러자 악마가 “웃자란 식물에게는 늦거름을 줘야지.”라고 말한다. - 음,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드라마 캐스팅을 하였으며 두 배우(악마역/정인이 역)가 틱틱거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컷!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