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꽃 Oct 21. 2024

불쑥 성장할 수 있을까? <합체>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9 <열다섯에 곰이라니> 함께

 <합체>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능글맞고 유머러스한 문투가 일품인 소설이다.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주인공인 ‘오합’, ‘오체’에게는 소위 '‘난쟁이’ 아버지를 두었기에 키가 자라지 않아 몹시 속상한 대한민국 남자청소년'이라는 무거운 사연이 있다. 삶의 애환이 ‘키’ 말고 없을 리 없으나 소설 속의 두 소년은 오직 키 크기만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가다가 만난 계룡산 도사로부터 방학 동안 계룡산에 와서 수련을 하면 키 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과연 합과 체는 계룡산으로 갔을까?    

  

키 크고 싶다는 남자 청소년들의 열망

학생들에게 책을 소개할 때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 만약 이 주인공 소년들이 정말로 도사의 힘을 받아 키가 불쑥 커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판타지일 것. 물론 현실에서도 한 일 년쯤만에 불쑥 자라는 기적을 보여주는 소년은 많지만 도술이나 수련으로 단 한 달 만에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끝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했는데 이 소설이 판타지는 아님을 알고 한편 씁쓸, 한편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키는... 성장은... 사실 유전과 과학의 힘이 큰 '현실'이더라.



너무 일찍 떠난 작가박지리 

글쓰기론에서 좋은 글을 쓰려면 이렇게 하라고 많이 하는 말이 있다. 1) 세상에 나아가 많은 것을 경험하라 2) 글쓰기 좋은 당신만의 공간을 가져라. 

그런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어떤 유명한 드라마 작가는 생전 사회생활을 안 하다시피 한다는데 시정의 온갖 인물상들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린다. <합체>를 쓴 박지리 작가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생전에도 방에서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사를 꿴다. 심지어 자기가 살아본 적도 없는 ‘어린 남자(주인공들은 남자고등학생들이다)’의 심리까지 알다니. 그래서 작가의 영역은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영감이 스스로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오게 한단다. 그 가운데 좋은 작품들이 나오면 작가 스스로도 이것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가 작동한 건 아닌가, 싶단다.      

길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자신의 방에 스스로 유폐되다시피 했으면서도 유쾌 발랄하고 꿋꿋한 합과 체의 모습을 남겨준 박지리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난쟁이 아버지'는 혹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한 오마주였을까. 작가는 가고 없지만 작품은 은근히 청소년소설계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열다섯에 곰이라니>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늑대 아이>를 좋아한다. 다양한 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라서. 그중 주인공인 유키와 아메 두 아이가 자랄 때 늑대로 변했다가, 인간으로 변했다 하는 장면에서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성장할 때 마구 뛰어놀거나 제멋대로 굴 때는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강아지나 토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도무지 통제 불능인 어떤 동물적 본능이 솟구치는 듯한. 영화에서야 원래 이 아이들은 늑대아빠와 사람엄마 사이에서 난 아이들이라 그런다는 설정이지만 현실의 사람아빠 + 사람엄마 사이에서 난 사람아이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나.     


<늑대아이>, 그리고 내 아이들의 '동물화'를 추억하며

<열다섯에 곰이라니>를 쓴 추정경 작가는 혹시 사춘기에 동물처럼 변하는 자녀나 학생들을 키우거나 길러본 사람이 아닐까. 열받으면 눈빛이 확 변하는 저것이 내 딸 내 아들 맞나 싶은 경험을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한 번 이상은 하지 않나. 과연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 맞나 싶게 사춘기 때 청소년들은 동물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본능만 남고 이성이라는 것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도 보인다. 그러다 가끔(나중에) 사람의 정신으로 돌아오면 자기가 왜 그랬나 깊은 자괴감에 빠지며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참한 성찰적 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작가는 자고 나니 어느덧 동물로 변해버린 '청소년의 동물화 현상'으로, 그것도 전국적 이변으로 묘사한다. 국가와 사회는 이것을 일종의 재난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예민하고 불안하기가 비둘기 같고 미련하기는 곰보다 더하며 영악하고 못돼먹기로는 원숭이 못지않다. 하지만 동물은, 통제 불능하고 이성과 언어가 잘 통하지는 않더라도 얼마나 사랑스럽고 그 자체로 생명력 넘치는 존재인가.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사춘기 자녀들 '그 잡채'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리 총량에 한없이 수렴하는 지*발*을 해도 우린 너무나 깊이 그들을 사랑하니 말이다.


발랄함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물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이 된다. 내가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걸로 보아서는 잠시 다른 인격을 부여하는 어떤 존재나 과학적 힘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이 소설에 사춘기 자녀를 둔(두었던) 어른들이 공감하는 만큼 당사자들도 공감을 하는지는 심도 깊은 인터뷰가 필요한 바이다. 하긴, 

“자네 요즘 왜 이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이렇게 물을 때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호르몬이 장난치나 봐요. 저도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 사춘기는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존재하고, 그것을 느껴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성숙함이란 '자기 안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라지 않나. 칸트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일 터이다. 이 책이 좀 계몽적인가 싶어 중1 젖살이 아직 덜 빠진 '형아'한테 물었다. “책, 재미있니?” 

계몽이고 자아인식이고 성찰이고를 떠나 그는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네~!” 힘차게 대답한다. 재밌으면 0칼로리 된 거다. 중1 남자를 한 시간 동안 책에 몰두하게 해 준다면 일단 좋은 책인 거다.           

이전 08화 조선시대 청소년으로 산다면? <오백 년째 열다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