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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Oct 17. 2024

성장은 이렇게 혹독하다 <아몬드>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7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함께



“아직도 <아몬드>를 안 읽었어?” 

한때 독서 시간이나 국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그만큼 재미있기로 소문난 책이었다. 책 고르기를 할 때 ‘경매 방식’을 자주 하는데(남자중학생들의 별 ‘씰데없는’ 경쟁심을 이용하는 사악한 전략이라고나 할까?) 책 이야기할 때 "중간에라도 이 책이 읽고 싶으면 먼저 손드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하면 묘하게 집중하고 묘하게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물론 재미난 책을 50권이나 가져가기 때문에 경쟁에서 도태되었다고 재미없는 책만 읽게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지만. 그때 가장 치열하게 읽고 싶어 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손원평의 <아몬드>다.


공감을 못한다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 제목은 왜 ‘아몬드’일까? ‘아몬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뇌의 편도체, 그리고 이것이 작아 일종의 선천적 질병으로 봐야 하는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감정표현불능증)’에 대해 먼저 말해준다. 새봄 첫 시간에 국어 시간에 가장 가르치고 싶은 것은 ‘공감 능력’이라며 ‘국어를 잘해야 연애도 잘한다'라고 강조했기에 “이 편도체가 너무 작아 주인공 윤재는 공감능력이 없대.”라고 말했을 때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가족에 닥친 불행, ‘묻지 마 칼부림’과 그것을 목격한 주인공 아이 이야기에서 몰입도를 높이고는 “여러분처럼 건강하고 다정한 친구들도 지금 이 나이에 혼자 살아야 한다면 세상이 쉽지 않겠죠? 그런데 공감능력마저 없이 혼자 남은 주인공은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 그 뒷이야기 궁금하신 분 손~!” 하고 외친다. 물론 그 뒤에 더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짐을 넌지시 알려주면서.     


너는 슬픔도 모르는 놈이냐는 질책

윤재가 처한 어려움은 단지 일반적인 공감을 못 하는 것, 돌볼 사람이 없는 것만이 아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참변을 목격하고도 공포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이야말로  더 큰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윤재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공감을 ‘연습’시켰다. 

<아몬드>는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심지어 선천적으로 부족할지라도 길러질 수 있음을 말한다는 면에서 귀하다. 윤재 자신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였지만 방황하는 친구 곤이를 만나 그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서로 배운다. 청소년 소설은 대개 친구나 이웃들의 도움으로 서로 돕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그건 그저 지루한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천년을 거듭해서 말해주고, 문학작품으로 강조해 마지않아야 할 가치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고 결국 (그게 좋은 건진 모르겠으나) 이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관건도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라지 않나.     

   

     

<아몬드>는 초초초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아직 그 전말을 잘 모르겠는, 한창 잘 나갈 때 절판 선언을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절판본을 들고 가서는 “얘들아, <아몬드>가 앞으로는 출판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전에 내가 너희들 읽히려고 몇 권 사놨잖냐. 고맙지? 이 귀한 책 읽으실 분~?” 하며 경쟁심을 부추기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저자가 차린 출판사에서 이야기는 보완되어 계속 나온단다.  나 장난친 거 아니다, 얘들아?     


어느 날 '내'가 죽었다?

사춘기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함께 폭발하는 시기이다. 어른이 되면 뭐 그게 더 세련돼지지도 않긴 하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춘기의 호르몬 뒤편에는 ‘죽음’의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 있다. 어린것들이 무슨 죽음이냐고 분개하는 어른들아, 우리의 사춘기 때는 어땠나 반추해 보자. 적어도 나는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죽고 싶다’와는 다른 ,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무섭고도 매혹적인 상념들. 그런 경험은 사춘기의 초자아를 자극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발적인 제목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간다. 어느 날 죽은 게 너도 아니고 ‘나’라니. 죽고 싶다는 건지, 자신의 죽음을 사후 관찰하는 혼령이라도 되었다는 건지?

사실 이 제목은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 유미의 친구 재준이 유미가 선물해 준 푸른 일기장 맨 처음에 써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준이가 평소에 죽고 싶어 했던 아이는 아니다. 단지 ‘시체놀이’라고, 방바닥에 누워 가만히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즐겼던 생각 많은 사춘기 소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치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재준이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다. 어느 날 갑자기.


보통 아이들이 겪는 사춘기 마음은

소설에는 각각의 남사친/여사친으로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재준이와 유미의 우정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안에 사춘기 때 청소년들이 품을 만한 고민들이 거의 다 나온다. 담배, 이성 교제, 부모의 불화, 불안 등등.      

이 책을 부모님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춘기의 특성, 그 시절에 할 만한 생각들이 교과서처럼 들어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소년이 너무 아련한데 친구의 죽음을 겪어야 하는 유미의 마음은 더욱 쓸쓸해서. 읽다 보면 자녀들, 학생들에 대해 새로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 나온 지가 벌써 20년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유미와 재준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서 부모가 되었을 나이이다. 하지만 생각 많은 사춘기들의 심란한 정신세계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아니, 40여 년 전 나 때와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이 이토록 오래 읽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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